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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단양팔경② 구담봉ㆍ옥순봉--퇴계를 사모한 애틋한 열여덟 두향
[헤럴드경제=단양]열여덟살 관기(官妓) 두향은 빼어난 미모에 시와 거문고에 능했다. 어린나이에 매화 가꾸는 재주도 뛰어났다. 미모와 지성을 두루 갖춘 두향은 새로 부임하는 사또를 모실 관기로 배정받았고 영특했던 그는 사또의 취향을 미리 파악하며 맞을 준비를 모두 마쳤다.

1548년 정월, 조선 최고 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ㆍ1501~1570년) 선생이 단양 군수(사또)로 부임했다. 그의 나이 48세 꽃중년이었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이 둘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퇴계 선생은 부임 전후 몹시 힘든 시기였다. 사별했던 첫 부인에 이어 두번째 부인과도 사별했고 을사사화로 삭탈관직까지 겪은 후 자원한 단양 군수였다. 또 부임 한달만에 둘째 아들 채(寀) 마저 잃었고 그 자신은 늘 병마에 시달렸다. 하지만 선비의 기품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런 퇴계 선생이었지만 그도 마음만은 아팠던 때였다. 그 무렵 두향이 곁에 있었다.

옥순봉

두향은 구담봉과 옥순봉 근처 두항리(斗項里)에서 태어나 자랐다. 두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살 때 어머니까지 잃은 그 역시 외로운 처지에서 관기 신분이 됐다. 그의 이름은 마을 이름과 비슷한 발음을 따와 두향(杜香)으로 지었다. 자라면서 이웃 옥순봉의 아름다움에 빠져있던 두향은 퇴계 선생이 부임하자 마자 청풍(현재의 제천) 땅인 옥순봉을 단양에 편입시켜 달라고 청을 넣었다.

하지만 청풍 부사가 거절하자 퇴계 선생은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글을 새겨 ‘단양의 관문’임을 ‘선언’했다. 훗날 청풍 부사가 그 글씨에 감탄해 단양군에 넘겨주면서 단양팔경 중 하나로 편입됐다고 한다. 지금은 물론 제천 땅이다. 이 단구동문 암각은 안타깝게도 충주호 속에 잠겨있다.

구담봉

사또는 어떻게 관기의 그 어려운 청을 소중하게 받아들여 줬을까.

마흔여덟 퇴계 선생의 마음을 흔든 열여덟의 두향은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 매화는 이미 전부터 퇴계 선생의 벗이기도 했다. 이를 이미 간파했던 두향은 ‘남자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았던 것.

하루는 퇴계 선생에게 매화를 선물했다. 이 매화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물려준 것으로 두향이 8년간 잘 길러온 화분이었다. 청백리의 퇴계는 그것도 뇌물이라 생각해 받기를 거부했다. 두향은 “매화는 고상하고 격조가 높으며 향기로운데다가 엄동설한에도 굽힘이 없는 기개를 가졌다”며 “우리 고을도 그렇게 잘 다스려 달라”고 설득하자 퇴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는 두향이 그의 마음을 사려고 철저히 준비했던 ‘전략’이기도 했다.

이후 ‘외로운’ 두 사람은 산수가 수려한 주변을 다니며 풍류를 즐기고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함께 ‘단양팔경’을 완성해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퇴계가 단양 군수를 10개월만에 그만두게 돼 이별을 맞는다. 퇴계는 자신의 친형 온계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도지사)로 부임하자 “형제가 한 지역에서 상하관계로 일하면 나랏일이 공평함을 잃을 수도 있다” 하여 이웃인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자원한다.

10개월의 짧은 만남, 이들도 이별의 술잔 앞에 앉았다. 퇴계 선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말없이 먹을 갈던 두향이 붓을 들었다. 그리고 서글픈 심정을 시 한 수로 표현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제 / 어느 듯 술 다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후 둘은 영영 만날 수 없었다.

퇴계가 떠나자 두향도 후임 사또에게 자신이 ‘다른 남자’를 모실 수 없음을 청한다. 그리고는 관기에서 나와 고향마을 강 맞은편 강선대(降仙臺) 옆에 초가를 짓고 퇴계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생활한다. 단숨에라도 달려가 만나고 싶었지만 공직에 있는 퇴계를 위해 그럴 수도 없음을 잘 아는 두향.

퇴계 역시 두향을 잊지 못했다. 이들은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다. 퇴계는 두향에게 쓴 편지에 시 한 수를 보냈다.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 비어있는 방 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말라”

두향이 퇴계 앞에서 거문고 줄이 끊기자 애교섞인 투정을 부렸던 모양이다.

퇴계는 풍기에서도 1년만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토계(안동)로 낙향한다. 그리고는 명종과 선조의 끊임없는 벼슬 임명에도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살았다. 두향과 떨어져 산 지 20여년, 퇴계는 일흔의 나이(1570년)에 몸져 눕는다. 이 소식을 들은 두향은 단숨에 달려가고 싶지만 역시 갈 수 없는 몸, 멀리서나마 정화수 앞에서 눈물로 주야 기도를 올린다. 퇴계의 병색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해 음력 12월 “저 매화나무에 물 잘 주라” 는 한마디 남기고 눈을 감는다.

두향은 며칠을 날밤 새며 퇴계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먼 발치에서 남몰래 빈소만 바라보고 대성통곡하며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는 며칠을 굶다가 집 근처 강선대에 올라 강물에 몸을 던져 퇴계를 따라갔다. 유서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강가 거북바위에 묻어다오. 거북바위는 내가 퇴계 선생을 모시고 자주 인생을 논하던 곳이니”

두향의 묘소

너무나 애절한 러브스토리다. 무릇 서른살 나이 차를 넘어 조선 최고의 학자와 관기와의 짧지만 긴 사랑의 여운, 오늘날 우리도 이런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가슴 속에 품고 산다면 참으로 훈훈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지고지순의 사랑에 목말라 있는 우리들이기에. 단양은 물론 근래에는 안동에서도 퇴계와 두향의 넋을 기리는 행사를 시작했다.

퇴계 선생과 두향의 러브스토리가 살아숨쉬는 구담봉ㆍ옥순봉으로 떠나보자. 구담봉ㆍ옥순봉은 호숫가에 우뚝 솟은 암벽기둥이다. 가장 일반적인 관광은 36번 국도변 충주호 단양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는 것. 유람선을 탈 때는 구담봉ㆍ옥순봉행을 꼭 확인하고 타야 한다. 장회나루 매표소는 두군데 있는데 하류쪽(왼쪽) 매표소로 가야 한다. 

옥순봉

유난히 추운 올 겨울, 나는 ‘단양의 스승’ 이해송 선생님을 또 졸라 동행했다. 함께 해서 배워야 할 게 많아서였다. 항상 공사다망하신 이 선생님은 내 청을 또 거절 못하신다. 추웠지만 주말이라 가족 친구 여행객들이 꽤 많았다. 우리는 선상으로 올라가 경치를 즐겼다. 이 선생님은 퇴계와 두향의 이야기를 구슬프게 이어나갔다. 직접 참가한 최근 10년간 두향의 원혼을 달래는 제례 때 마다 비가 내려 ‘두향의 눈물’일거라고 모두가 의미를 새겼다고 한다.

왕복 약 1시간의 유람, 배는 이윽고 두향의 묘소 앞을 지난다. 못다 한 사랑을 품고 간 한 여인의 무덤이라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퇴계 선생과 함께 한 짧은 사랑 긴 이별이었지만 500년 가까이 지났어도 그 러브스토리가 가슴 뭉클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이어 서쪽을 향한 배가 동쪽을 바라보는 구담봉 앞에 다가가니 거대한 암벽산이 물길을 가로막아 장관을 연출한다. 배는 서서히 암벽 아래까지 다가가다가 북쪽으로 90도 꺾고 곧바로 다시 서쪽으로 급하게 튼다. 저 앞 왼쪽에 또 다른 기암괴석 옥순봉이 자태를 뽐내며 점점 다가온다. 이곳에서 배는 파노라마 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요즘처럼 동절기에는 정오무렵 관광은 피하는게 좋다. 구담봉과 달리 옥순봉은 정남향으로 바라보는 각도여서 정오의 낮게 깔린 태양은 역광이 되어 옥순봉 바위에 부딪히면서 빛이 현란하게 부숴진다. 때문에 그 멋진 풍경은 검은 실루엣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오전이나 오후 태양의 각도를 비껴서서 봐야 옥순봉은 새하얀 속살을 살짝 드러내 준다.

옥순대교 밑을 지났다가 되돌아오는 코스, 주변 경치 어느것 하나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호수로 물이 높이 찬 상태지만 퇴계 선생과 두향이 거닐던 시절은 그저 남한강이었을테니 옥순봉은 더 높게 치솟았을 법 하다.

실제 퇴계 선생은 단양의 경치를 구경하고 쓴 ‘단양산수가유자속기(丹陽山水可遊者續記)’를 통해 당시 풍경을 생생하게 남겼다. 옥순봉에 대해 “그 높이는 천 백장(丈)이 될 만 한데 우뚝하게 기둥 처럼 버티어 섰고 빛깔은 푸르기도 하고 희기도 했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이 우거져 멀리서 바라보기는 하되 오르지는 못하겠다. 이 모양을 보고 옥순봉(玉荀峯)이라 이름 붙인다” 라고 묘사했다.

또 옥순봉 아래 물길은 화탄(花灘)이라 부르는데 물길이 그때도 용솟음치며 빨랐음을 적고 있다.

구담(龜潭)에 대해서는 “물이 장회탄으로 흘러 서쪽 구봉(龜峯)의 벼랑에 부딪혀 맴돌아 구담의 첫머리가 됐고 북쪽으로 돌아 서쪽으로 꺾으면서 구담의 허리부분이 되었으며 꼬리는 채운봉의 발치에서 끝났다”고 묘사했다. 필자가 유람선에서 미리 봤던 그 파노라마식 풍경과 완전히 일치했다. 

구담봉

퇴계 선생은 이 주변의 경치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을 남겼는데 그때까지 이름없던 봉우리에 직접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퇴계 선생은 이 경치를 두고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 보다도 낫다”고 격찬했다.

이곳 여행길에 460여년 전 대학자의 유람길을 연상하며 똑 같은 심정으로 경치를 즐겨보는 맛,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경치를 조선의 다른 선비들인들 놓칠리 없다. 퇴계는 물론 수많은 선비들이 멋진 시로 남겼고, 단원 김홍도는 이 옥순봉을 바라보며 ‘옥순봉도’를 남겼다. 조선 대화가 김홍도가 바라본 옥순도와 그 작품으로 남긴 그림을 비교해보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구담봉과 조선화가 이방운의 구담봉 그림
옥순봉과 조선화가 김홍도의 옥순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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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와 1000원짜리 지폐 그리고 두향의 묘 : 퇴계는 평소에도 매화를 좋아해 이를 소재로 쓴 글만 해도 1180편이 넘는데 대부분이 두향과 함께 한 이후 쓴 작품이다. 현재 1000원짜리 지폐에 퇴계 선생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도산서원과 그 위로 매화 20여 송이가 드리워져 있다. 퇴계와 두향의 애틋한 사랑의 연결고리였던 매화, 퇴계는 눈을 감으면서까지도 매화(두향) 걱정을 했다.

퇴계 선생이 두향과 함께 하며 접했던 거문고에 대해 쓴 작품으로 또 ‘금보가(琴譜歌)’가 있다.

퇴계(진성 이씨 가문)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에 영의정을 지낸 충청도 출신 이산해(李山海: 한산 이씨)의 가문에서 한일합병 이전까지 ‘스승의 연인’인 두향의 무덤을 대대로 돌보며 제사 지내왔다. 이산해는 퇴계 선생이 단양 군수 시절 제자가 됐었다.

두향의 묘비에는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가 1720년에 지은 시가 있어 그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외로운 무덤 하나 국도변에 있는데 / 거칠은 모래밭엔 꽃도 붉게 피었네 /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면 / 강선대 바윗돌도 사라지리라”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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