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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기회를 잡아라 그리고 버텨라…마지막으로 ‘나’ 를 이겨라
IBK기업은행 여성 최고위직…권선주 부행장이 밝힌‘ 유리천장’깨는 법
1978년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던 2월 어느 날. 서울 신촌 한 커피숍에서 대학을 막 졸업한 20대 여성이 3장의 입사통지서를 놓고 생각에 잠겼다. ‘영어교사’, ‘내외경제신문<현 헤럴드경제> 수습기자’, ‘중소기업은행 신입행원’.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영어교사나 기자가 궁합에 맞았다. 은행원은 평소 생각했던 것과 거리가 멀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다시 고민에 빠졌다. 교사는 인기가 없고 기자는 재미있어 보였다. 은행원은 딱히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입사통지서를 차례로 돌려보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래, 아버지와 언니 뒤를 따라가야지.’



# 1. “기회를 잡아라”

지난 2011년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던 1월 16일. IBK기업은행 창립 50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부행장이 탄생했다. ‘IBK기업은행 부행장 권선주’. 33년 전 세 장의 입사통지서를 놓고 진로를 고민하던 그 여대생이었다.

생각이 많던 여대생은 기업은행 공채 17기로 입행해 대한민국 은행권 최초의 공채 출신 여성 부행장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권 부행장의 남자 동기들은 모두 퇴직했다. 4명뿐인 여자 동기들은 결혼과 동시에 일찌감치 은행을 관뒀다.

남성도 살아남기 힘든 보수적인 조직이 은행이다. 여기서 여성 임원의 탄생은 ‘유리천장(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막는 보이지 않는 벽)’을 산산조각 낸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꼭 2년이 지났다. 대한민국 사회는 여성 대통령을 배출할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권 부행장은 카드사업본부에서 리스크관리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남성적인 업무 문화가 더 짙게 배인 부서였다. ‘부행장 3년차’를 맞지만 본인은 여전히 유리천장을 깬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권 부행장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와 체력, 자기 관리를 요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뜸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너’라는 책을 소개했다. 권 부행장은 “한 사람이 자신의 갈 길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환경”이라면서 “환경 속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그 기회를 먼저 활용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 2. “버텨야 산다”

권 부행장은 전형적인 ‘뱅커(bankerㆍ은행원)’ 집안에서 자랐다. 기업은행에 입행할 무렵 아버지와 언니가 은행원이었다. 권 부행장이 은행원이 되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은행원’이 익숙해졌다. 이 때문일까. 35년간 은행 일을 하면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적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권 부행장은 “제가 입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도 은행에 취직했다”면서 “입행 후 가장 힘든 시기를 세 남매가 서로 의지를 하면서 잘 견뎌냈다”고 말했다. 언니와 여동생은 결혼 이후 가정과 직장생활을 병행하지 못해 결국 퇴사했다. 권 부행장도 여느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두 남매를 키우면서도 은행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부도난 중소기업 사장이 칼을 들이대고 위협할 때도, 100억원대 사기성 융통거래(실물 없이 자금만 거래)의 유혹이 들어와도 꿋꿋이 버텼다.

가장 큰 ‘정신적 지주’는 남편이었다. 대기업 임원을 지낸 남편은 항상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게 권 부행장을 격려했다. 아이들도 큰 말썽 없이 잘 자라줬다. 그렇다고 엄마 역할에 게으르지 않았다.

권 부행장은 “가족과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걸으면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풀게 된다”고 말했다. 여유가 있을 때는 저녁 시간을 이용해 ‘줄넘기 대화’를 한다. 한 명씩 돌아가며 줄넘기를 하면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한다.

요리는 권 부행장이 자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기다. 바빠서 반찬에 신경을 못 쓸 때는 밥이라도 제대로 짓는다. 현미밥에 밤까지 넣어 영양밥을 만든다. 권 부행장은 “여자 혼자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기는 힘들다”면서 “남자들이 집에서 자기 일만 열심히 해주는 것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권선주(오른쪽) IBK기업은행 부행장이 지난달 28일 서울 을지로 기업은행 본점 리스크총괄부에서 직원들과 업무 자료를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 3. “나 자신을 이겨라”

권 부행장은 평소 질문이 많다. 많이 묻고 많이 듣는다. 직원들을 긴장시키는 고약한 버릇이지만 새로운 업무를 배우는 권 부행장의 노하우이다. 권 부행장은 “모든 업무는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잘 듣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리스크관리업무에서도 숨어있는 리스크를 파악하기 위해선 먼저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책임자가 되기 전까지는 독학으로 은행 업무를 익혔다. 영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금융에는 문외한이었다. 금융연수원에서 보내준 책으로 집에서 공부하는 ‘통신연수’를 통해 신용분석ㆍ여신ㆍ외환 등 전문지식을 늘렸다.

권 부행장은 “행원 때는 휴일에 낮잠 한번 제대로 잔 기억이 없다”면서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면서 집에 가만히 누워 있으니 그때 ‘이게 낮잠을 자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마초들 사이에서 버텨내기 위해선 늘 긴장된 상태에서 자기계발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연차가 더해지면서 살아남기 위한 원칙도 세웠다. 직장 생활의 필요악인 ‘술자리’가 대표적이다. 무조건 1차만 한다는 게 첫 번째 원칙이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두 번째 원칙이다.

권 부행장은 소주 2병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정도로 술을 잘하지만 좋아하진 않는다. 권 부행장은 “회식자리는 꼭 2차, 3차로 이어지게 마련이지만 서로를 위해 1차만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면서 “술에 취하지 않도록 스스로 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 부행장은 리더를 꿈꾸는 여성 직장인을 위한 3단계 소통의 원칙도 만들었다. ‘중언부언하지 마라ㆍ절대 옮기지 마라ㆍ발전 방향을 갖고 소통하라’가 그것이다. 권 부행장은 “여자가 남자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소통 능력은 떨어진다”면서 “여성 리더가 되려면 선후배들과 원활한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성보다 개인주의적인 면도 꼬집었다. 권 부행장은 “자기 몫만 지키려고 하면 안 된다. 조직을 생각하고 마음가짐을 폭넓게 가져야 한다”면서 “동료들의 고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맥 관리도 필수다. 권 부행장은 여성 금융인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한다. 대표적인 모임이 ‘여성금융인 네트워크’이다. 외환딜러 출신인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장이 설립한 사단법인으로, 책임자급 여성 금융인 100여명이 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첫 여성 임원과 한국은행 최초 여성 금융통화위원을 지낸 이성남 민주통합당 정책위원회 부의장도 빼놓을 수 없다. 고교 선후배로 만났지만 지금은 권 부행장이 힘들 때 찾는 ‘멘토’가 됐다.

권 부행장은 “항상 내가 잘 돼야 여자 후배들도 잘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리천장을 깨는 후배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진성 기자/ipen@heraldcorp.com

권선주 IBK기업은행 부행장이 걸어온 길

권선주 IBK기업은행 부행장 ▷1956년생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78년 2월 중소기업은행 입행 ▷1998년 방이역지점장 ▷2001년 역삼중앙지점장 ▷2003년 서초남지점장 ▷2005년 CS센터장 ▷2007년 PB사업단 부사업단장 ▷2008년 외환사업부장 ▷2010년 서울중부지역본부장 ▷2011년 카드사업본부 부행장 ▷2012년 리스크관리본부 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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