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가지 않은 길만 가는 ‘강고집’
수십년 관료로, 시인·칼럼니스트로, MB노믹스의 지휘자로…최고 넘어 개척자의 삶 꿈꾸는 강만수 KDB금융그룹 회장
터키·베트남원전 수주전서 日 파이낸싱에 밀린 뒤 세계 50대 은행 구상…국제신용등급 최상위인 산업은행 키워볼만하다 생각
세계적 은행 되려면 소매금융 비중 30% 돼야…그래서 시작한 다이렉트뱅킹 1년만에 7조원에 가까운 돈 몰려
지금은 공존지수가 중요한 시대 신입사원 507명 중 317명 고졸·지방대 출신 채용…내년 3월엔 금융권 최초로 사내대학도 개설
다들 하는 비슷비슷한 사회공헌활동, 굳이 나까지…대신 스포츠·음악·미술 영재 지원하고 전통문화 육성하고파




바로 등 뒤에 걸린 고교시절 사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고희(古稀)를 앞둔 나이에도 꿈꾸는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터뷰 내내 두 얼굴은 겹쳤다 흩어졌다를 반복했다. 50년 세월의 더께 위로 경제장관의 지문을 남겼음에도 그에게는 아직 할 일과 말이 더 남은 것이다.

강만수(67) KDB금융그룹 회장은 해방둥이의 신산을 몸으로 겪은 세대다. 누구나 가난했던 해방 전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한때 문학도를 꿈꾸며 학교를 잠시 떠나기도 했고, 대학시절엔 혼돈의 사회상에 염증을 느끼고 브라질 이민도 고민했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국가 재건의 뜻을 품고 공무원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30년을 재무부와 재정경제원의 ‘강고집’으로, 그 후 10년은 ‘청설간서(聽雪看書ㆍ눈을 들으며 글을 읽어라)’의 망중한 야인으로, 시인으로, 칼럼리스트로 지냈다. 현 정부 들어서는 3년간 ‘MB노믹스의 지휘자’로 지낸 후 지난 3월 그가 선택했고, 그를 받아준 곳이 KDB금융그룹이었다. 

 
강만수 KDB금융그룹 회장은 “금융위기 과정에서 세계 유수의 투자은행(IB)이 문을 닫았다고 해서 대형 은행은 안된다는 식의 생각은 곤란하다”면서 “우리도 이제는 투자금융과 상업금융을 잘 조화시키고 체질을 키워 글로벌 플레이어로 뛸 수 있는 세계적 은행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회장이 산업은행 본점 야외정원 내에 설치한 세계에서 가장 긴 58m 거리 갤리리인 ‘파이오니어 갤러리(Pioneer Gallery)’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KDB산업은행을 세계적 은행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건 내 생각이기에 앞서 이 정부의 생각이었다. 터키 원전과 베트남 원전에서 일본 파이낸싱에 밀려 좌절한 뒤 최중경 경제수석과 백용호 정책실장이 우리도 세계 50대 은행을 만들어야겠다고 했다. 실은 인수위 때부터 매킨지가 한국에도 (글로벌 플레이어 역할을 할) 챔피언 뱅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었다. 그 뒤에 (금융위기에 웬 초대형 은행이냐는) 오해도 있고, 반대도 있고 해서 소위 챔피언 뱅크 아이디어가 무산되고 ‘새로운 우리 길’을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강 회장이 말하는 ‘새로운 우리 길’은 세계적 은행을 만들기 위한 ‘Pioneer beyond Best’라는 슬로건 위에 만들어졌다.

산업은행은 그동안 정책금융기관이 가보지 않았던 소매금융의 길을 걷고 있고, 실험해보지 않은 파격인사제도를 채택했다. 불우이웃돕기와 장학금 지원 일색인 사회공헌활동의 로드맵도 새로 마련했다. 불과 1년여 만에 소매금융상품인 다이렉트뱅킹에는 7조원 가까운 돈이 몰렸고, 신입사원의 절반 이상이 고졸ㆍ지방대 출신으로 채워졌다. 사회공헌활동의 중심축도 스포츠ㆍ음악ㆍ미술영재 지원과 전통산업 육성으로 바뀌었다. 


-강 회장 취임 후 산업은행이 확 바뀌었다고 들었다. ‘Pioneer beyond Best’를 슬로건으로 제시했는데.

▶새로운 상품, 새로운 서비스로 한국의 챔피언 뱅크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적 은행으로 발돋움하자는 의미에서 개척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소매금융에 본격 뛰어들었고, 대출금리를 낮춰주는 집단대출,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테크노뱅킹, 대기업과 협력 아래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동반성장펀드 등 다양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산은 입장에서 소매금융은 낯선 길 아닌가.

▶우리가 소매금융을 하는 것은 국내 시중은행과 경쟁하기 위한 게 아니다. 금융위기 이전과 이후 가장 많이 달라진 게 은행의 지속 가능성이다. 대마불패 신화도 깨지지 않았나. 세계적 은행이 되려면, 특히 현금 지급 능력인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을 맞춰야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 LCR가 떨어지면 해외 신용도가 떨어져 해외사업을 못한다. 소매금융 비중이 30% 정도 되면 이런 게 가능해진다. 그 때문에 소매금융에 뛰어든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모델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소매금융을 하라. 그래야 위기가 와도 안정된다’는 것이다.

-메가뱅크(초대형 은행)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은데 또 세계적 은행인가.

▶메가뱅크란 말을 내가 한 적도 없고, 거기에는 또 오해도 있다. 세계적 투자은행(IB)이 위기 속에서 넘어진 것은 덩치 때문이 아니라 체질개선이 안돼서 그런 것이다. 투자금융 업무에만 집중되어 있으니까 위기상황을 못 버틴 거다. (소매금융 등으로) 근육량을 늘리면서 덩치를 키우면 된다. 미국에서도 금융위기 후 IB와 상업은행(CB)이 합병을 하고, IB에 CB 사업권을 주고 그랬다. 일부 대형 은행이 무너졌다고 한국의 금융산업이 언제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시중은행도 많은데 왜 하필 산업은행인가.

▶다른 은행도 하면 좋다. 그런데 국내 시중은행은 아직 해외사업 경험이 일천하다. 시중은행이 세계적 은행이 되려면 10년 이상 인재를 양성해야 된다. 또 비이자수익이 50% 정도 있어야 하고, 해외 비즈니스가 30%는 돼야 하는데 국내 은행은 아직 여건이 안된다. 국제신용등급도 도이체방크나 BNP파리바, 골드만삭스보다 우리가 높다. 전 세계 은행 가운데 최상위 등급이다(무디스 Aa3). 현재 ‘더 뱅커’ 기준으로 세계 71위인데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통해 20위 안으로 들어가는 걸 목표로 정했다.

-세계적 은행이 되려면 자산도 늘어야할텐데 기업공개(IPO) 작업이 순탄치 않다.

▶세계적 은행이 되려면 증자를 해야 하는데 정부가 증자할 여력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IPO가 필요하다. 법으로도 그렇게 되어 있다. 민영화하고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마침 산업은행의 신용등급이 최고수준이니까 IPO가 된다면 자금 유치에도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지금이 우리에게는 기회인 셈이다. 가능하면 조기에 IPO가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경제가 되려면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은행이 있어야 된다. M&A의 경우에도 국내에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M&A 시장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지금 여러나라 금융당국으로부터 구두 인가를 받고 진행 중이다.

-시중은행보다 높은 이자를 주고, 대출금리를 낮춰준다는 데 그게 가능한가.

▶소비자에게 최고의 서비스는 ‘웃는 얼굴이 아니고 싼 가격에 좋은 제품’이다. 이건 월마트의 성공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상품으로 경쟁을 하지 다른 서비스로 경쟁을 안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새 점포를 만들 때도 기존 대우증권 점포 안에 들어가거나, 4~5층에 자리잡는다. 좋은 상품이면 4층이든 5층이든 안 찾아올 도리가 없다. 이렇게 했더니 점포 운영비가 시중은행의 3분의 1 수준밖에 안되고 그 돈을 고스란히 고객에게 돌려주게 된다. 대형 점포가 적은 게 오히려 강점이 된 것이다. 내가 금융정책을 오래하면서 느낀 것은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뢰의 핵심은 정직함과 단순함이다. 예금이자, 대출이자 정직하게 계산해서 얼마로 하면 적정한 이율이 되는지 알아보고 그대로 가는 것이다.

-산업은행이 고졸ㆍ지방대 출신 사원을 많이 뽑던데 정부 시책에 따른 것인가.

▶정부 시책 때문이라면 이렇게까지 많이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317명 가운데 227명).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으로 있을 때 고졸이, 지방대 출신이 왜 취업일선에서 사라지고 있는지 곰곰 생각해봤다. 1999년 정부가 학력차별을 없애겠다고 한 게 오히려 부작용이 됐다. 다들 서울지역 대졸만 뽑은 것이다. 그런데 막상 뽑아놓으면 지방지점의 경우 2년간 길 가르치다가 시간 다 보낸다. 부산ㆍ광주 등 지방 학생을 뽑으면 현지에서 바로 적응이 가능하다. 요즘은 IQ와 EQ 못지않게 NQ(network quotientㆍ공존지수)가 중요하다. 또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만회하려면 출산율을 높이거나, 이민을 받거나, 정년을 연장하거나, 취업을 일찍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독일의 평균 취업연령이 19세인데 우린 아직 26세다. 군대 경력을 빼도 너무 늦다. 고졸 채용은 이명박정부 정책 중에서도 성공한 정책이다. 그 친구들을 뽑아서 일도 가르치고 대학공부를 하도록 회사에서 도와줄 수도 있다(산업은행은 금융권 최초의 사내 대학인 KDB금융대학교를 내년 3월 개설한다).

-서민가계가 팍팍해지면서 사회공헌이 금융권의 새 화두가 됐다.

▶사회공헌이 활발한 건 좋은데 다들 비슷비슷하다.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일까지 금융권이 나설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은행이니까 사회공헌도 우리나라의 대외경쟁력과 국격을 동시에 높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공헌활동에 관한 자문을 거쳐 ▷창년창업 ▷문화창달 ▷인재양성 ▷공헌사업 등 4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현재 음악과 미술, 스포츠 분야 꿈나무를 지원하고 있다. 또 전통공예, 전통술 등 한국적인 전통문화 상품을 적극 지원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려고 한다. 바이올린을 아무리 해도 세계적 수준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가야금을 잘 연주하면 세계 문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개인적으로도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소시적에도 문학을 동경하긴 했다. 존 스타인벡이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을 보고 소설가가 되볼까 마음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땐 먹고살기에 바빴다. 그런데 우연찮은 기회에 시인이 됐다. 관료직을 내려놓고 1999년께 잡지 ‘시조문학’ 가을호에 명사 기고란을 쓸 기회가 있었다. ‘어려운 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다’는 내용의 시조를 기고했더니 이를 본 문인이 주목한 것 같다. 그래서 겨울호에 ‘그리움’이라는 연작시조로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다. 최근에도 간간히 글은 쓴다(그 옛날옛적부터 그리움이 있었네/세월은 흘러가고 그리움도 흘러갔네/흘러간 그리움따라 인생도 흘러갔네/(중략)/산다는 건 긴 세월에 흘러가는 그리움/그리움은 연어되어 모천으로 가는 길/가는 길 구만리 장천 인생은 그리움이라).

-세계 경제가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

▶최근 골드만삭스 임원을 만났는데 적어도 5년은 어렵다고 하더라. 내가 볼 때는 10년도 갈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금 경제위기의 본질은 단순한 금융위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게을러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전쟁과 자연재해, 대재앙이 일어나면서 끊임없이 각성할 수 있었는데 평화가 지속되면서 인간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졌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사람들이 다시 부지런해야 하고 근면해야 해결될 수 있다. 모두 빚을 얻어 펑펑 쓰곤 했으니까. 미국 저축률이 리먼사태 때 2.6% 정도 됐고 작년 6% 안팎이었는데 최소한 12%까지는 올라와야 한다고 본다. 이 문제는 재정금융정책이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성실하게 살면서 저축하는,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재건하는 문제다.

-우리나라 경제에도 영향이 클 것 같다.

▶아무래도 세계경제가 어려우면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면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앞으로 세계의 중심은 동아시아라는 게 미래학자의 생각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발간한 ‘메가체인지 2050’에서도 2050년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 미국을 100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105로 세계 최고 선진국이 된다고 예측했다. 일본은 50, 중국도 52 정도다. 그래서 내가 만난 골드만삭스 임원도 “투자할 곳은 한국밖에 없다”고 하더라.



관료 경력이 수십년이면 ‘반관반정(半官半政)’이 됐을 법도 한데, 대선을 코앞에 둔 정치의 계절에 만난 그는 도무지 정치적 감각이 없어 보였다. 환율ㆍ감세ㆍ메가뱅크 등 연이은 논쟁에서 올바르다 생각하면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처럼 이날도 그는 에둘러 말하는 법도, 적당히 타협하는 법도, 여론을 의식하는 법도 없이 머릿속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놨다. 덕분에 1시간을 예정한 인터뷰는 2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마무리됐다.

양춘병 기자/yang@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