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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의 광대 ‘이야기’ 를 이야기하다
등단 50주년 맞은 소설가 황석영의 장편 ‘여울물소리’…이야기꾼 이신통의 일생통해 우리네 흥 · 恨의 서사 담아내
“ 엄격한 신분제도로 유지되는 유교적 세상에서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놀랄 만한 선언을 했던 동학의 출현은 그야말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히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말했던 최제우와 그러한 사상을 평
생 동안 도망다니며 실천하고 퍼뜨렸던 최시형 역시 ‘큰 이야기꾼’이었다.”   ( ‘작가의 말’ 중)



“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이식문화로 시작된 한국 근ㆍ현대문학의 원류를 더듬어 이제 울창한 우리네 서사의 숲에 들어선 느낌이다.”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은 칠순의 소설가 황석영이 펴낸 ‘여울물소리’(자음과모음)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황석영이 오래 품어온 화두 ‘이야기에 관한 연구’라 할 만하다. 스스로를 ‘시대의 광대’로 여긴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들려주고 알리고, 마침내는 스스로 이야기가 되는 삶을 소설의 주인공, 이신통에 담아냈다.

‘여울물소리’는 19세기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봉건왕조가 무너져내리던 격동의 시기, 민중의 팍팍한 삶을 다독여 준 이야기꾼 이신통의 떠돌이 삶을 그린다. 시골 양반과 기생 첩 사이에 서녀로 태어난 연옥과 떠돌이 패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연옥이 사라진 이신통의 행적을 쫓으며 이신통의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신통은 서얼의 서자로 태어나 주변부 인생을 산다. 전기수, 강담사, 재담꾼, 광대물주, 연희 대본가로 떠돌다 천지도에 입도해 혁명에 참가하고 스승의 사상과 행적을 기록하는 역할을 맡는다.

작가는 “당시의 이야기꾼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했다. 책 읽어주는 전기수, 재담꾼, 강담사는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서도 서민들의 부름과 환대를 받았다. 사람 여럿만 모이면 바로 판이 마련됐다. 작가는 이들이 작자 미상인 수많은 방각본 언패소설의 생산자이자, 흔들리는 신분층의 변동 속에서 더 이상 신분상승을 할 수 없었던 독서계층이었을 것으로 본다.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던 서얼이 그 중심에 놓인다. 


소설은 사실 각종 떠돌이 패들이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연희패, 풍물패, 장꾼들의 얘기가 넘쳐난다. 이와 함께 작자 미상의 각종 방각본 소설과 타령, 소리와 잡가, 민요 , 시조창 등이 마치 덩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고구마 넝쿨처럼 풍성하게 담겨 있다. 19세기 거리의 이야기에는 흥과 노래가 함께했다.

“나비 없는 동산에 꽃피면 무얼 하나/임 없는 방 안에 단장하면 무얼 하나/나는 간다 나는 간다/못된 임 따라 나는 간다.”

연옥이 이신통의 소식이 감감한 가운데 만삭이 된 배를 안고 찬방에 쪼그려 앉아 시름겨워 부르는 정요(情謠)다.

놀량패들이 찾아든 색주가의 구례댁 월선이 뽑는 별주부전의 ‘고고천변’도 한 대목.

“수정문 밖 썩 나서, 고고천변 일륜홍 부상에 둥실 높이 떠, 양곡의 짙은 안개 월봉으로 돌고 돌아, 어장촌 개 짖고, 회안봉 구름이 떴다.”

이들은 본래부터 ’여울물소리’를 위해 지어진 듯 자연스럽고 서로 잘 어울린다. 이는 소설 ‘손님’ ‘심청’ ‘바리데기’ ‘낯익은 세상’ 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실험에 또 하나의 발견처럼 보인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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