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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쉼표> 정동 1900
아이 손바닥만한 크기에 30여장 될까 말까 한 얄팍한 문고. 누렇게 바랜 표지에는 앳된 소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책 제목은 ‘printemps parfume´’. 한국소설 ‘춘향전’이다.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가 소설가 로니와 함께 불어로 번안해 1892년 당튀 출판사에서 펴낸 외국어로 번역된 국내 첫 소설이다.

이 프랑스판 춘향전은 기존의 춘향전과 많이 다르다. 마치 서양의 가벼운 로맨스 소설을 보는 듯하다. 책의 삽화 속 춘향이는 드레스를 입고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늘어뜨린 채 그네에 앉아 상념에 빠져 있다. 춘향이와 이도령은 무도회에 나가 춤을 추고, 사랑에 빠진 둘은 옥중에서 키스를 한다. 변학도는 끝내 이몽룡의 칼에 죽는다.

한국의 문화가 서양인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개항과 함께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고, 정동에 외국 공관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영국 선교사 올링거 부부가 창간한 ‘코리아 리포지터리’에는 아리랑 악보가 한글 노래가사와 함께 실렸으며, 헐버트는 ‘코리아 리뷰’를 통해 한국학을 소개하는 등 한국문화를 알리는 데 열정적이었다.


정동은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겨 황제로 등극하면서 더 바쁘고 화려해진다. 교회와 학교, 병원, 호텔, 진기한 상점이 잇따라 들어섰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가게에는 파운드당 0.75달러인 새로 볶은 모카커피를 비롯해 미국 버터롤, 농축 우유, 블랙베리잼, 잉글리시 햄, 테이블 와인 등이 넘쳐났다. 거리엔 고소한 커피향과 버터 냄새가 가볍게 떠다녔을 터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전시 중인 ‘정동 1900’을 보면 낯선 문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또 누군가는 왜 애써 다른 문화를 알리려 하는지 생각이 깊어진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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