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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어서 지구 한바퀴…이해준의 ‘희망가족’> 이슬람의 비운 간직한 붉은 성채…애잔한 선율 흐르는 듯…
<22>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13~14세기 이슬람 건축미의 극치
카톨릭 공세에 맞서던 비장함까지
2000년이후 가장 가고싶은 관광지로

라이온 궁 웅장한 돌기둥 위용 과시
아라야네스 연못에 비친 푸른하늘엔
정교한 이슬람 조각 자연과 완벽조화


[그라나다(스페인)=이해준 문화부장] 아직 새벽 어둠이 가시기 전인 6시30분 첫째 아들의 독촉에 화들짝 일어났다. 알함브라(Alhambra) 궁전 입장권을 사려면 일찍 가서 줄을 서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랴부랴 일어나 간단히 씻은 다음 궁전 언덕으로 향했다. 그라나다 시내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지만, 매표소 앞엔 벌써 많은 사람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작은 도시인 그라나다에 우수에 젖은 듯 서 있는 알함브라 궁전.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보존가치가 높고, 찾는 사람도 많아 하루 관람객 수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입장권 예약제를 실시하는데 예매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당일 입장권을 오전 8시 현장에서 판매한다. 우리 가족은 그라나다에 도착해 현지 지방은행의 ATM 단말기를 통해 예매를 시도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표를 구할 수 없어 당일 새벽 매표소로 달려간 것이었다.


긴 줄의 맨 끝에 서자 우리 뒤로 금세 긴 줄이 더 만들어졌다. 옷깃을 파고드는 새벽의 찬 공기를 맞으며 두 시간 정도 기다린 끝에 오후 입장권을 받아쥘 수 있었다. 1인당 13유로씩 모두 52유로(약 7만8000원)를 주고 티켓 4장을 받았다. 우리 한참 뒤에도 많은 사람이 차례를 기다렸지만 그들 모두 입장권을 살 수는 없었다. 알함브라는 돈이 있어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알함브라는 유럽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이슬람 궁전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는 궁전이다. 13~14세기 섬세한 이슬람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데다, 비극적인 스토리도 갖고 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유럽인의 입장에서 알함브라는 이슬람의 신비로움과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어서 2000년대 이후 가장 선호하는 관광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도 스페인에서 보고 싶은 문화유적으로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건축물과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꼽고,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를 거쳐 그라나다로 달려온 터였다. 새벽에 구입한 소중한 입장권을 들고 숙소로 돌아와 늦은 아침식사를 한 다음 스페인의 저항시인 로르카 기념관 등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오후 시간에 맞춰 본격적인 알함브라 탐방에 나섰다.

알함브라 궁전으로 향하는 길엔 3m가 족히 넘어 보이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조경수가 도열하듯 좌우로 늘어서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궁전을 감싸고 있는 성곽 밖으로는 옛 이슬람인 거주지와 공중목욕탕 등이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전시돼 있어 이곳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먼저 관람시간이 제한되는 나스르 왕조의 궁전으로 향했다.

알함브라를 건설한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초. 아프리카 북부의 무어인이 지중해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스페인 거의 전역을 장악했다. 북동부로 쫓겨난 가톨릭 세력은 곧바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에 나서 수백년간 처절한 전쟁을 벌였다. 12~13세기에는 사라고사와 세비야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국토를 회복(재점령)했다.

그라나다는 당시 이슬람이 가톨릭 세력의 공세에 맞서던 최후의 거점이었다. 알함브라 궁전은 1238년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를 창건한 알 갈리브가 건축을 시작해 1300년대 중반 7대 왕 유스프 1세에 의해 완공됐다. 왕궁 건축에 100년 이상이 걸린 셈으로, 안달루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마지막 풍요를 구가했다. 하지만 그 영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릉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알함브라 궁전. 13세기 후반~14세기 이곳을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에 의해 건축돼 유럽에서 이색적인 풍취를 자아낸다.

왕궁이 완공된 후 150년 정도가 흐른 1492년 이슬람과 가톨릭 세력이 이곳 그라나다에서 최후의 전투를 치른다. 이들은 알함브라 궁전 아래 계곡 건너편의 작은 산인 사크로몬테 지역에서 격돌했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최후의 항전을 결의한 이슬람 세력은 사크로몬테 언덕을 피로 물들이며 장렬하게 죽어갔다. 이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뤘다고 한다.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은 패색이 짙어지자 궁전을 내주고 북아프리카로 도주하다 알함브라를 보며 그 아름다움에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492년 그 해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스페인 ‘대항해 시대’의 막을 연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하다. 희비극이 교차한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함브라 궁전은 옛날 모습 그대로 처연히 서 있었다.

나르스 궁으로 들어갔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궁전이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기둥과 벽면,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기하학적 문양은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했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본 중국이나 인도, 유럽의 궁전과 확연히 달랐다. 특히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나 오스트리아 빈의 쉔부른 궁전은 넓은 부지에 위압적인 건물로 절대권력의 위상을 보여주었다면, 알함브라는 규모는 서민적이라 할 정도로 작았지만 아름답기는 숨막힐 정도였다.

나르스 궁은 메수아르 궁, 코마레스 궁, 라이온 궁으로 구성돼 있는데 서로 붙어 있어 가이드북을 보면서 하나하나 살피지 않으면 구분이 어려웠다. 메수아르 궁으로 들어가자 기하학 문양으로 가득한 왕가의 기도실이 나타났다. 기도실 창으로 과거 이슬람 거주지이자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알바이신과 사크로몬테 언덕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도를 올리던 왕의 경건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코마레스 궁의 안뜰인 아라야네스 정원 가운데엔 이슬람 건축물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연못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연못으로 파란 하늘과 궁전이 반사됐다. 이 물이 궁전 곳곳을 돌면서 한여름 열기를 식히고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정화한다고 한다. 돌기둥이 숲을 이루듯 도열해 있는 라이온 궁, 정교한 이슬람 조각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종유석 장식 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스르 궁전을 지나니 후원이자 귀족의 처소였던 파르탈 정원, 나스르 왕조의 여름별장이었던 헤네랄리페가 잇따라 펼쳐졌다. 이번엔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디자인이 또다른 감탄사를 자아냈다. 파르탈 정원엔 크고 작은 연못과 거미줄 같은 수로, 잘 가꾸어진 조경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헤네랄리페에는 산에서 내려온 물을 정원 곳곳에 공급하는 수로가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공간 구성이 ‘사람’이 살기에 훨씬 좋아 보였다. 알함브라는 황제가 권력을 휘두르는 장소라기보다는 하늘과 구름과 바람, 물 등 자연이 건축물 및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곳 같았다. 유럽인이 이곳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알함브라가 세상에서 주목받은 것은 이슬람 세력이 물러간 지 수백년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이슬람의 패퇴 후 알함브라는 한때 스페인 왕조가 성채와 왕궁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17세기 이후 점차 잊혀지면서 황폐해졌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여행자와 유럽 역사학자에 의해 그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가 ‘재발견’되면서 복원이 이루어졌다. 특히 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이 이곳에 머물면서 1832년 집필한 ‘알함브라의 전설’이 인기를 끌면서 이의 재발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는 천천히 궁궐을 돌아보다 힘들 때엔 벤치에 앉아 졸기도 했다. 시간이 머문 듯 마음도 편안해졌다. 흰구름이 떠있는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알함브라 궁전에 흠뻑 빠져들었다. 말 없는 궁전을 바라보자니 19세기 스페인 낭만주의 음악의 최고봉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기타 소리가 흐르는 듯했다. 감미로우면서도 애절하게 이어지는 그 곡조를 듣고도 사랑의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메마른 사람이라고 하지만, 알함브라를 보고도 마음의 울림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메마른 사람이라 할 만했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곳이었다. 새벽 잠을 설치며 낸 비싼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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