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양대근 기자]문재인 후보가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문 후보는 16일 경기 고양체육관에서 열린 서울지역 순회 경선에서 투표율 60.61%를 얻으며 누적득표율 56.52%를 기록, 전승을 이루며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확정지었다.
문 후보가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이름이 거론된 것은 그의 저서 ‘운명’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다. 이후 그는 작년 말 ‘혁신과 통합’을 통해 야권대통합에 참여했고 지난 4ㆍ11 총선에서는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돼 대선 후보의 길로 들어섰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 오늘날 문 후보가 유력 정당의 대선후보가 되기까지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문 후보는 이날 수락연설에서도 “(경선 승리까지)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며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국민 참여시대를 열었던 김대중ㆍ노무현 두 분 대통령이 계신다”고 밝혔다.
대학시절 ‘반유신’ 투쟁에 나섰던 그는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해 판사를 희망했지만 시위 전력 탓에 좌절됐다. 이후 그는 변호사의 길을 걷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당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났다.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며 의기투합한 그들은 함께 동업을 결정했다. 또한 6월항쟁이 있었던 1987년,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됐을 때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문 후보가 상임집행위원을 맡으며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1988년 노무현 변호사가 13대 총선에 출마해 정치권에 입문한 후 문 후보는 부산에 남아 노동관련 변호사로 활동했다. 2002년 노무현 당시 후보가 대선 경선 후보로 나서자 문 후보는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아 다시 손을 잡았다.
대선이 끝난 후 문 후보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민정수석을 맡은지 1년이 못된 2004년 2월에 격무와 당시 총선에 출마하라는 열린우리당의 요구를 거절하며 생긴 불편함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탄핵 심판이 기각된 뒤 시민사회 수석으로 청와대로 다시 복귀, 이후 민정수석으로 다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참여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청와대 비서실장직을 맡았다.
문 후보는 퇴임 후에 노 전 대통령의 김해 봉하마을행과 함께 양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참여정부 인사들을 향한 검찰비리수사 속에서 그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의혹과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을 전적으로 방어했다. 노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 문 후보는 노무현 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았다. 이 같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그에게 친노의 적통 자리를 물려줬지만 참여정부의 공과를 모두 안고 가야 할 책임까지 지웠다는 분석이다.
이후에도 줄곧 정치권의 러브콜을 거절하며 현실 정치 참여를 거부해오던 그는 지난해 6월 자서전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 이 때부터 정치적 보폭을 넓혀 민주통합당 출범을 위한 야권대통합에 참여하고 4ㆍ11 총선을 거쳐 대권 도전을 공식화했다. bigroot@heraldcorp.com
▶문재인 후보의 이력
▷경남 거제 출생(1953년) ▷부산 경남고 졸업(1971년) ▷경희대 법대 입학(1972년) ▷학생운동으로 투옥, 서대문 구치소 수감(1975년) ▷특전사 육군병장 만기 제대(1978년) ▷경희대 법대 졸업 및 사법고시 합격(1980년) ▷경희대 동문 김정숙씨와 결혼(1981년)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 설립(1982년) ▷부신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1985년) ▷부산민주헙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1987년) ▷법무법인 부산 설립(1995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부산 선거대책본부장(2002년) ▷청와대 민정·시민사회 수석(2003~2005년) 및 비서실장(2007년) ▷고(故)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2009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2010년) ▷혁신과통합 상임공동대표(2011년)▷민주통합당 국회의원(부산 사상) 및 상임고문(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