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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보다 더 흔한 질병 ‘성적 트라우마’
회상환상·공황장애…
파괴적인 성적 트라우마
피해자·가해자 공통된 고통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아동 성 학대의 충격적 진실
아픔 이겨낸 이들의 휴먼스토리


아동 성범죄로 사회가 들끓으며 화학적 거세, 전자발찌 등 법적 장치 강화와 사형제도 부활까지 거론되고 있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다. 특히 유교적 관습이 배어 있는 한국사회에선 그동안 아동 성범죄를 사회적 논의 대상에서 배제해왔기 때문에 공론화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시각도 있다. 그저 아동 성도착증에 걸린 몇몇 나쁜 아버지, 이웃 아저씨의 변태 행위로 보는 게 지배적이다.

그러나 다양한 통계를 보면 이는 특수한 사건이 아니다. 아동 성범죄 관련 세계적 권위자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국 정신과 전문의에 따르면, 드러난 건 단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전 세계 여자의 25%, 남자의 10%가량이 성인기 이전에 아동 성학대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세계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희생자다.

따라서 아동 성범죄를 강도나 상해 같은 일반 범죄의 한 유형으로 다루는 건 아동 성폭력에 대한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처사라는 것이다. 

정 박사는 2010년 미국에서 펴낸 ‘섹슈얼 트라우마’의 한국어판에서 무엇보다 희생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30여년에 걸친 방대한 연구와 많은 사례, 그리고 직접 수천명의 환자를 치료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정 박사는 아동 성학대 희생자에 대한 세밀하고 실증적인 치유 매뉴얼과 그들을 도울 사회 시스템을 제안한다.

그는 책에서 먼저 우리가 잘 알 만한 인물 가운데 성적 트라우마의 징후를 보인 이들의 삶의 일면을 보여준다. 40, 50년대 항공업계와 영화계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로 화제를 뿌린 하워드 휴즈는 청소년기 삼촌 루퍼트로부터 잠자리 요구를 받고 유혹에 굴복하지만 자기혐오와 죄책감 속에 말년엔 기행을 일삼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테오도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조카 앨리노어 루스벨트는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음을 시사하는 전기기록을 통해 정치적 에너지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파헤친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 중 한 명인 오프라 윈프리는 아홉살 때 친척과 친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백한 뒤 대중의 더 큰 지지를 얻었다.

저자는 다이애나비의 생전 여러 차례의 끔직한 자해행위와 폭식증 등도 부모가 이혼했던 어린시절, 성적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적 트라우마는 피해자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어린시절 집단강간에 참여하거나 비정상적인 성적 환경에 놓이는 것도 성적 트라우마를 남긴다고 말한다.
 
“성적 트라우마는 세상과 피해자 자신으로부터 부당한 멸시와 오해를 받아왔으며, 그 결과 제대로 된 치료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적 트라우마는 암이나 에이즈보다도 더 흔한 질병이며, 전 인류의 무려 3분의 1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성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본문 중)

성적 트라우마는 피해자마다 다른 모습 나타나지만 희생자가 겪는 공통된 증세는 있다.

저자의 임상경험에 따르면 그 중 하나가 회상환상이다. 이는 희생자가 겪게 되는 가장 두렵고 혼란스러운 후유증으로, 분별할 수 없는 이미지ㆍ소리ㆍ냄새ㆍ통증ㆍ촉감을 비롯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 갑작스럽게 덮치는 것이다.

회상환상이 정확히 어떤 원리로 일어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통스러운 충격은 몇년 혹은 몇십년 동안 무의식 속에 파묻혀 있게 된다. 이는 성충격 사실을 기억 못하는 때도 폭발하듯 일어나 기이한 행동을 유발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시 불러내 마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성적 트라우마의 또 다른 끔찍한 증상은 공황장애다. 갑작스러운 몸의 경련, 격한 심장박동, 호흡곤란 등 곧 죽을 것 같은 공황장애는 제대로 치료하지 않을 경우 심장신경증, 광장공포증, 강박장애행동을 야기할 수 있다. 우울증, 유아기로의 퇴행 등도 그렇다.

성적 트라우마의 피해자가 스스로 충격적 성행위를 반복하고 집착하게 된다는 점도 이해가 필요하다. 흔히 성적 학대의 희생자와 가해자 사이에 형성된 유대관계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데, 이런 파괴적인 행동의 반복은 절망이라는 창살에 갇혀버리게 만든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수많은 임상사례를 제시하며 진단과 치료 대책 로드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성적 트라우마는 여타 충격과 달리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친밀한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 이후엔 충격 경험을 회상하고 다시 체험하는 것, 그리고 일련의 치료과정에 대한 시간 스케쥴을 명확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성적 트라우마를 가진 모든 환자를 대상으로 심층 심리치료를 일차 목표로 하는 것은 실용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또 사회제도적인 문제에도 시선을 돌린다. 환자는 보통 의료보험의 기본 요건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신속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보험 체계를 손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적 트라우마가 피괴적이고 혼란스럽고 좌절스럽긴 하지만 사형선고나 불치병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분별심과 이해심, 사랑을 회복하고 전문가의 개입이 적절히 이뤄진다면 아이는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다른 감수성과 창조력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적 피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허둥대는 한국사회에 지침서가 될 만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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