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걸어서 지구 한바퀴…이해준의 ‘희망가족’> ‘위로 받기 전에 먼저 위로를’…聖프란체스코의 음성이 들리는듯
<18> 가톨릭 ‘영성의 심장’…이탈리아 중부도시 아시시 순례

기워입은 옷 등 남루한 그의 유품
보석으로 치장한 聖物보다 거룩해 보여

평생 ‘청빈·자비·평화’의 삶 몸소 실천
탐욕의 시대 사는 현대인에 ‘깊은 울림’


[아시시(이탈리아)=이해준 선임기자] 우리 가족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세계와 소통하면서 각자의 꿈과 우리 시대의 희망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경쟁의 폭주기관차에 몸을 싣고 살아온 부모는 부모대로, 입시 압박에 시달려온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현실에서 떨어져 진짜 자신을 찾고 싶었다. 이를 위해 관광지 중심이 아니라 희망을 얻을 만한 여행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탈리아에서 슬로푸드의 본고장 오르비에토를 돌아본 것이나,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 아시시를 찾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시시는 로마와 피렌체 사이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다. 로마나 피렌체에서 기차로 각각 2시간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우리는 오르비에토를 떠나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서 4박5일 머물며 옛 도시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다음, 아시시로 향했다. 아르노강과 두오모, 붉은 지붕들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피렌체도 잊을 수 없었지만, 아시시가 준 감동은 그 이상이었다.

피렌체에서 아시시로 가는 기찻길 옆으로 중북부 이탈리아 전원의 아름다운 모습이 끝없이 이어졌다. 넓은 들판과 산등성이에선 벚꽃이 활짝 피어오르고, 나무와 풀들은 고운 연두색으로 새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말을 탄 순례자가 프란체스코 성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조각상 너머로 성 프란체스코 성당과 수도원이 바라보인다.

아시시역에서 내리자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건너편 언덕 위에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성당, 구시가지가 고풍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 역에서 구시가지까지의 거리도 상당해 기차에서 내린 주민과 관광객들은 모두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봄기운에 흠뻑 빠져있던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새 들판 한가운데로 이어진 농로와 마을길을 향했다.

들판에는 따뜻한 햇살을 받아 만물이 소생하고 있었고, 밀은 겨우내 참았던 싹을 막 틔우고 있었다. 흙냄새, 봄 냄새가 싱그러웠다. 곳곳에서는 농부들이 밭을 고르고, 집을 손질하고, 나무 가지치기를 하느라 분주했다. 들판 사이의 작은 길을 가볍게 뛰기도 하면서 가로지르는 기분이 남달랐다. 관광지만 다니는 여행으로는 느끼기 어려운 정취, 배낭여행자의 특권이었다.

멀리 언덕 위에는 프란체스코 성당과 수도원이 움브리아의 넓은 들녘을 굽어보듯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성당과 수도원은 언덕의 왼쪽 끝의 높은 성벽 위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 오른쪽으론 구 도시가, 성당 반대편에는 시청사가 각각 위치해 있었다.

바로 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성인은 중세 교회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었다. 그는 배타적인 종교적 도그마와 허영에 휩싸인 당시 기독교 사회를 비판하며, 직접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는 등 ‘소박한 삶’을 실천했다.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들었던 파격이었다. 그가 주장한 검약, 절제, 자비의 덕목은 최고 권력을 향유하던 종교계에 신선한 충격이었고 혁명이었다.

언덕 위의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올라가니 생각했던 대로 움브리아의 넓은 들녘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당엔 프란체스코 성인의 기념관과 지하 묘지가 있었고, 그의 유품도 전시돼 있었다. 성당 앞에는 말을 탄 순례자가 걸음을 멈추고 프란체스코 성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는 조각상이 서 있었다. 왠지 모를 경건함과 숙연함이 전해지는 듯했다.

프란체스코는 중세 기독교가 전성기를 누리던 1182년 아시시의 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을 부족할 것 없이 보낸 그는 젊은 시절 한때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했으나, 23세 때인 1205년 종교에 귀의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깊은 성찰과 수도 끝에 1210년 청빈(가난)과 복종, 자비의 계율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이의 실천에 나섰다.

37세 때인 1219년 십자군전쟁의 광풍이 몰아치던 이집트로 포교활동에 나서 십자군과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평화를 설교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그는 1266년 44세로 영면할 때까지 주로 아시시에서 성직자로 활동했다.

프란체스코가 세상에 나왔을 때 이탈리아 종교계는 각종 분파투쟁으로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소수자들은 다수자들의 압제에 당하지만 않았고, 각 도시들은 도시들대로,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권력과 부를 향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 사이엔 평화에 대한 염원이 불타올랐고, 젊은 프란체스코는 이들의 고통을 보면서 평화의 사상을 싹틔웠다고 한다.

그의 사상은 ‘모든 사람이 형제’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까지, 성직자에서 죄수까지, 심지어 비기독교인도 형제라고 주장하며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성직자들을 사라센과 비기독교지역으로 파견했다. 그 자신도 이를 실천했다. 기독교계가 십자군으로 무장하고 이교도들과 광기의 전쟁을 펼치던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그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 “정복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안내문에는 “아시시는 신과 인간, 자연이 조화롭게 살던 지역으로, 심지어 태양과 달, 별, 불, 물, 바람까지도 평화로움을 느끼는 지역”이라며 “성 프란체스코는 그들을 ‘형제’ ‘자매’라 부르며 새와 동물에게도 복음을 전파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비판만 하거나 이에 실망해 눈물을 흘리지만 않고, 스스로 대안을 찾아 ‘실천’했다는 것이었다. 권력과 재산, 성공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고, 낡은 옷을 기워 입고, 곡괭이를 들고 농사를 지으며, 검소하고 절제하는 삶을 몸소 실천했다. “위로받기 전에 먼저 위로를 베풀고, 이해받기보다 먼저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 먼저 사랑하게 해주소서…”로 시작하는, 그의 ‘평화를 위한 기도문’에는 실천을 중시했던 그의 사상이 집약적으로 표현돼 오늘도 애송되고 있다.


교회에는 허름한 그의 유품이 보존돼 있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치 걸승이 입었을 듯하던 누덕누덕 기워 입은 옷은 그가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곳곳을 여행하며 보았던 중세 교회와 성직자의 화려한 장식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그 남루하고 소박한 유품이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성물(聖物)보다 더 거룩해 보였다.

우리는 성당은 물론 프란체스코 성인의 무덤과 유품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전에도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프란체스코의 삶과 사상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깨달음의 기쁨이 가슴에 몰아쳤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희망의 씨앗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성당을 나와 구시가지로 접어들자 마치 중세의 작은 마을로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고, 소박하고, 정감이 가는 마을이 펼쳐졌다.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메인 도로와 주위의 건물들이 ‘개발’ 바람을 타면서 상업주의 냄새를 풍겨 아쉬움을 남겼지만, 좁은 골목은 중세 때 모습 그대로였다. 프란체스코를 만난 뿌듯함과 감동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프란체스코 성인은 ‘풍요와 탐욕, 약육강식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덕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가 강조한 검소한 생활 태도와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는 자비의 정신, 갈등과 분쟁을 뛰어넘는 평화의 사상이야말로 이 시대의 고통을 구원할 정신이 아닐까. 특히 그가 실천한 소박한 삶, 단순한 삶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아를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삶의 대안을 제시하는 듯했다. 900년 전 세상에 나와 기독교의 새 지평을 연 프란체스코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부활하고 있었다. 

hj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