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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준 희망가족 여행기<17>새 삶의 대안, 슬로푸드의 기원을 찾아
【오르비에또(이탈리아)=이해준 선임기자】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와 폼페이에 이어 로마를 여행하면서 ‘삶의 질’에 대한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유럽을 강타한 경제난과 대도시 로마의 번잡함이 겹친 탓도 있겠지만, 이들의 경제적 성취에 비해 삶의 질이 형편없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숙소가 제공하는 아침 식사를 접하면서 그 의문이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는 중국에서 인도~그리스를 여행하면서 가격이 저렴하고 다국적 여행자들과 어울릴 수 있는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주로 묵었다. 로마에서도 테르미니역 근처의 호스텔에서 나흘간 묵었다. 숙소를 고를 때는 아침식사 포함 여부를 세심히 따졌다. 아침이 포함돼 있으면 식당을 찾거나 직접 조리하지 않아도 되고, 예산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호스텔에서도 아침을 제공했는데, 인근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는 쿠폰이었다. 하지만 쿠폰을 들고 레스토랑에 가보니, 그걸로 먹을 수 있는 건 크로와상 하나와 차 또는 커피가 전부였다. 아침 식사로 빵 한 조각과 차 한 잔이라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저렴한 숙소에서 산해진미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걸 아침이라고 내미는 걸 보니 기가 막혔다.

‘이걸 문화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삶의 질’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카운터에 서서 빵 한 조각과 카푸치노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고 황급히 사무실로 향하는 로마인들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의문도 몰려왔다. 갈수록 팍팍한 경쟁에 내몰리면서 이탈리아가 낭만과 정열, 미각(味覺)의 나라라는 명성에서 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았다.
절벽 위에 자리잡은 오르비에또 구시가지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으로는 구시가지가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 절벽 아래쪽에는 드넓은 들판에 집들이 아름답게 흩어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오르비에또(Orvieto)를 다음 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오르비에또는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새 관광지로 뜨는 곳이었다. 중세 거리를 그대로 간직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우리는 특히 10여년전 이곳에서 슬로푸드와 이를 지원하는 도시 네트워크인 슬로시티, 즉 치타슬로(Cittaslow) 운동이 시작됐다는 데 관심이 있었다.

로마에서 오르비에또까지는 100km 정도로, 기차로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로마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지만, 우리는 1박2일 머물며 곳곳을 탐방했다. 국제 슬로푸드 운동의 중심인 세계슬로시티협회 사무국도 방문했다.

기차를 타고 오르비에또 역에 내리니 마치 시골의 작은 역 같았다. 시가지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오르비에또 시가지는 비교적 넓은 분지 한 가운데에 불쑥 솟아오른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었고, 역은 절벽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시가지로 올라가기 위해선 바위로 된 절벽에 거의 수직으로 터널을 뚫어 만든 케이블형 기차인 푸니콜라레를 이용해야 했다.
오르비에또 구시가지로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 입구. 사진 아래쪽의 광장 아래에 넓은 주차장이 설치돼 있고 엘리베이터는 절벽 바위를 수직으로 뚫고 만들어져 있다.

푸니콜라레를 타고 구 시가지로 올라가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아담한 중세마을이 잘 보존돼 있었고, 마을 둘레는 모두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땅에서 불쑥 솟아오른 작은 고원 위에 중세 마을이 들어선 형국이었다. 절벽 아래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 작은 마을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구 시가지엔 700년이 넘은 멋진 두모오 성당과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골목엔 수공예품에서부터 기념품, 골동품, 의류 등을 파는 가게는 물론 식당, 카페, 바, 호텔, 작은 서점 등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차 있었다.

오전 10시가 넘자 로마에서 당일치기 관광에 나선 사람들이 광장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푸니꼴라레와 광장을 잇는 셔틀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20~30명 정도의 관광객들을 쏟아냈는데, 한국인은 거의 없고 섬세한 멋을 즐기는 일본인들이 유난히 많았다.

숙소를 잡은 다음, 마을을 천천히 돌아보다 흥미로운 시설을 발견했다. 절벽에 놓인 엘리베이터였다. 주민들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은 다음 위로 타고 올라올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었다. 그런 엘리베이터는 마을의 다른 쪽 끝에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구 시가지에서 일반 차량을 볼 수 없었던 것이 떠올랐고, 구 시가지를 걷는 기분이 왜 상쾌했는지 이해가 갔다.
오르비에또 구시가지의 골목. 수공예품과 기념품 등을 파는 상점은 물론 카페, 레스토랑 등이 오밀조밀 들어서 있으며, 오후 6시가 넘으면 퇴근한 주민들로 왁자지껄해진다.

세계슬로시티협회 사무실은 오르비에또 지방정부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무실은 크기 않았고, 직원 1명과 사무총장이 근무하고 있었다. 모두 바쁘게 일을 하고 있어, 슬로시티 자료를 받고 최근 현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슬로푸드 운동은 패스트 푸드가 판을 치는 기존의 먹거리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 생산성과 효율성 및 경제성장에만 집착하면서 삶의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문화를 뛰어넘는 총체적인 삶과 사회의 개혁운동이었다.

다른 시민운동과의 차이점은 지역 음식과 장인 공동체 및 이들의 풍부한 지혜에 주목하고, 이것을 살리는 것이 궁극적인 변화의 출발점이라고 본다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인증제도를 실시하고 있는데, 인증을 받으려면 6개 범주의 52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 조건을 보니 슬로푸드 및 슬로시티 운동이 단순한 먹거리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히 드러났다.

몇 가지만 보면, 환경보호 조건에는 재생가능한 에너지와 대중교통의 지원 여부, 자원재활용 여부가 포함돼 있다. 지역 우선 조건에는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공예품의 사용 여부와 유기농 여부가, 삶의 질 측면에서는 대안적 교통수단, 자전거 도로, 노인에 대한 서비스 여부를 측정하도록 돼 있다. ‘슬로우’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통합에 대한 책임 등도 인증 조건에 포함돼 있다.

한마디로 공동체를 회복하고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지속가능한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거의 모든 ‘진보적’ 조건들을 담고 있는 셈이었다. 세계슬로시티협회는 1999년 10월 오르비에또에서 창립돼 21개 국가의 140여개 도시가 참여하고 있다. 사무국 직원은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갖고 있다”며, “유럽 경제위기에도 관심이 식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사무국에 오래 머물기가 미안해 직원이 건네는 자료를 챙겨 사무실을 나서 다시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낮에만 해도 조용하던 마을이 오후 6시를 넘자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젊은이들이 마을 중앙의 펍 근처로 몰려와 차와 맥주를 마시면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을 한편의 운동장에선 축구를 즐기는 주민들도 있었다.

호텔 직원에게 이 지역의 핵심산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중심은 전자부품 생산이며, 와인생산 및 관광산업도 주요 산업이라고 말했다. 구시가지의 7000명을 포함해 주민이 모두 2만명이 되는데, 낮에는 일터에서 일하고, 퇴근 후 이웃과 어울려 수다를 떨어대며 피로를 푼다고 했다. 지역 공동체가 살아 있어 주민들이 동고동락한다면 경제가 어려워도 그게 행복이 아닐까 싶었다.

저녁 때가 돼서 슬로푸드의 진면목을 체험하기 위해 인증식당으로 향했다. 겉으로 보면 크게 다른 게 없지만, 유기농 방식으로 지역에서 생산한 재료로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우리는 수프와 파스타, 양고기, 돼지고기에 와인까지 1병을 주문했다. 지금까지 6개월째 해외여행을 하면서 먹은 식사 가운데 최대 호화판 식사였지만 아깝지 않았다.

슬로푸드로 식사를 하고 나니, 정신적ㆍ육체적인 만족감이 몰려왔다. ‘삶의 질’ 측면에서 의문을 품었던 이탈리아에서 한가닥 희망을 발견한 것 같았다. 물론 이것이 완벽하지 않고, 로마와 같은 대도시에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삶의 질을 향상시킬 대안을 슬로푸드가 제시하는 것 같았다. 오르비에또를 떠나 피렌체로 향하면서도 슬로시티 선언에서 강조한 문구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슬로우하게 산다는 것은 성장(growth)보다는 개발(development)을 지속해 경제적 혜택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깨어있고 공부하는 사람과 사회만이 높은 삶의 질을 향한 것들을 선택할 것이며, 그것이 지구의 희망이 될 것이다.”

/hjlee@heraldcorp.com


<여행 메모>

여행기를 쓰고 있는 이해준 헤럴드경제 선임기자 겸 디자인포럼 사무국장은 지난해 10월12일 한국을 출발, 가족과 함께 아시아에서 유럽~남미~북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는 ’희망찾기 세계일주’를 펼쳤습니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아내와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2명, 중학생인 조카와 함께 한 이번 여행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각자의 삶과 우리 사회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았습니다. 때로는 우왕좌왕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진한 가족애와 함께 감동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들 가족의 생생한 여행 뒷 이야기는 인터넷 여행카페인 ’하루 한걸음(cafe.daum.net/changdonghee)’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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