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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스포츠 칼럼 - 이두식> 내 생애 가장 치열했던 7년
1973년 가을. 모교(홍익대)의 조교생활을 막 끝냈을 즈음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연달아 세상을 뜨셨다.

부모님의 잇단 부음에 5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슬픔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웃들은 ‘금슬 좋은 부모님이셨기에 같이 떠나셨고 필시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고 위로했지만 그 슬픔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부모님은 큰 고생 없이 유복하게 사시다가, 뒤늦게 경제적 문제에 봉착하시면서 말년에 고생이 많으셨다. 그렇게 돌아가셨기에 가슴이 더 아팠고 나 역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당시 나는 결혼한 지 1년이 막 지난 신혼이었다. 화가로선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던 시기였다. 부모님 장례를 치르느라 우리 부부는 갓난 아기를 월세로 살던 서민아파트 앞집에 잠시 맡겼었다. 장례를 마치고 아들을 넘겨받았는데 열이 펄펄 끓는 것이었다. 하늘이 노랬다. 수소문 끝에 유명한 소아과병원으로 달려갔더니 급성폐렴같다며 당장 입원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입원보증금이 없어 불덩이 같은 아들을 안고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내를 병원에 남겨둔 채 나는 입원보증금 3만원을 구하러 병원문을 나섰다. 누구를 만나야 돈을 구할 수 있을까 골몰하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렇게 막 광화문 골목길에 접어드는데 ‘두식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고교 7년 선배였다. 너무 반가왔다. 마침 선배는 ‘1주일 전부터 널 찾았다. 일이 급하니 바로 도와달라’고 청했다. 평소 선배가 수출그림(상업화) 사업을 하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두말 않고 수락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입원보증금을 받아 아들을 입원시킬 수 있었다.

경북 영주 출신인 나는 꽤 여유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 마흔한 살에 늦둥이로 날 낳아 기르셨기에 애정이 각별했다. 그림 잘 그린다고 당시 하나밖에 없던 예고 미술과에 진학시켜주셨고, 대학 진학 후에는 가세가 기울었지만 무사히 졸업하게 해주셨다. 군생활은 장교로, 고교 때부터 좋아하던 여학생을 아내로 얻으며 힘들었지만 화가로서 무지갯빛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몹시 팍팍했다.

다행히 선배와의 약속대로 수출용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니 최저생활비는 벌 수 있었다. 모두들 ‘이발소 그림’이라 부르는 상업화의 예술적 가치는 논할 처지가 못 됐다. 그저 열심히 고객이 원하는 대로 그릴 뿐이었다. 밤샘작업도 숱하게 했다. 생존을 위해 상업화를 7년간 그리면서 나는 ‘이 작업도 언젠간 분명 약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조형훈련’으로 여기게 됐다.

어려서부터 미술수업을 받았지만 그 7년은 회화 제작에 있어 마치 군인이 유격훈련을 받는 것 같은 과정이었다. 똑같은 그림을 대여섯장 그리기, 붓터치 없이 페인팅 나이프로만 그리기, 흑백으로만 그리기, 인상파기법, 극사실기법 소화하기 등등. 나는 그림에 있어 거의 ‘만능’이 되다시피 했다.

이제 나는 화가로서 제법 자리를 잡았지만 지금도 가끔 나태해질 때면 그 치열했던 젊은 시절을 반추해 보곤 한다. 간혹 말이 통하는 후배에게는 청춘의 내 모습을 꺼내 보여주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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