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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준 희망가족 여행기<16>서기 79년 8월, 지중해변 도시로의 시간여행
【나폴리(이탈리아)=이해준 선임기자】아테네와 테살로니키, 메테오라, 델피에 이어 크레타섬까지 11박12일 동안 그리스를 여행한 다음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비행기로 두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지만, 우리는 페리를 이용했다.

페리를 선택한 것은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여행의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배가 운항하는 지중해, 정확히 이오니아해(海)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탄생지이며, 두 문화를 잇는 해역이 아닌가. 그곳을 직접 배로 건너보고 싶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이오니아 항로는 생각보다 멀었다. 오후 6시 그리스 남서부의 파트라스 항구를 떠난 배는 다음날 오전 9시30분에야 이탈리아 바리항에 도착했다. 16시간 반이 걸린 셈이다. 페리에는 식당과 커피숍, 바, 매점 등 필요한 모든 시설이 구비돼 있고, 잔잔한 지중해를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배의 일렁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편안히 여행할 수 있었다.

지중해를 건너며 해가 지고 뜨는 것을 보는 것은 짜릿한 경험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200여년 전 천년제국 로마를 건설한 전설적인 로물루스 형제의 조상도 아테네보다 먼 트로이를 떠나 바로 이 해역을 건넜을 것이라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하고, 컴퓨터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면서 지중해 횡단을 즐겼다.

바리에 도착한 다음, 다시 기차를 타고 4시간을 달려 첫번째 목적지인 나폴리에 여장을 풀었다. 나폴리는 그 자체로도 볼거리가 많았지만 우리는 인근에 있는 폐허가 된 고대도시 유적 폼페이에 관심이 많았다. 다음날 기차를 타고 폼페이로 달려갔다.
기원후 79년 화산 폭발로 한 순간에 사라졌다가 1600여년이 지나 발굴돼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의 중심 상가 모습. 마차 바퀴자국이 난 도로 양 옆으로 식당과 목욕탕 등 당시의 상업공간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폼페이는 기원전 8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상업으로 번영을 누렸던 고대 도시였다. ‘풍요의 땅’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 남부 콤파니아 지방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다 기원전 4세기 말 영토를 확장한 로마 공화국의 동맹으로 편입돼 로마 문화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기원전 90~89년에는 로마와의 동등한 사회정치적 지위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마군에 의해 진압되고 식민지로 편입되면서 새로운 건축이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지금의 폐허 유적 대부분이 당시 지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폼페이는 비운의 도시였다. 한창 번영을 누리던 기원 후 79년 8월24일 인근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전조증상으로 17년 전인 62년 대지진이 발생해 큰 타격을 입어 주민들이 재건에 나섰지만 피해가 워낙 크고 여진이 지속돼 복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산 폭발 당시 폼페이를 덮은 것이 이글거리는 용암이 아니라 뜨거운 화산재와 돌 등이어서 그때의 건축물과 상가, 주거지역은 물론 조각, 그림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화산재에 묻힌 폼페이는 그 후 1600여년 동안 지하에서 잠자고 있어야 했다. 폼페이 유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6세기였지만 1748년에 들어와서야 발굴이 시작됐고, 고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19세기에 접어들어 체계적인 발굴이 이뤄졌다. 드디어 2000년전 도시 모습과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 화산 폭발 당시의 비극적인 순간이 그대로 드러나자 학계는 경악했다.

폼페이 신도시를 지나 폐허 유적지에 다다르자 입이 딱 벌어졌다. 말로만 듣던 신비의 고대도시 하나가 구릉 위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 있었다. 이건 유적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는 아테네나 로마 같은 곳과 달리 아예 한 도시 전체가 통째로 서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고, 특히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둘째 아들 동희는 흥분상태에 빠져들었다.

폼페이 외곽의 공동묘지였던 네크로폴리스를 돌아 옛 도시에 접어들자 원형극장이 나타났다. 기원전 70년 경 건립돼 약 2만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3단으로 나뉘어 관람할 수 있도록 자리가 배치돼 있었다. 무대엔 문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노예나 죄수인 검투사(글래디에이터)가 입장하는 문이었고, 다른 쪽은 경기 도중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검투사가 나가는 문이었다. 모양은 웅장하지만, 창과 칼을 들고 실제 피를 흘리며 싸우고, 관중석에선 그 피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끔찍한 장소였던 셈이다.
사라진 ’신비의 도시’ 폼페이에서 연극을 비롯한 각종 공연과 주요 정치 집회가 열렸던 야외 극장 앞의 정원. 열을 지어 서 있는 돌기둥 유적들이 지금으루보터 2000년전 번영했던 폼페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어 폼페이 주민들이 먹고, 자던 주거공간이 길게 이어졌다. 도로를 포장한 돌에는 마차 바퀴자국이 선명했다. 좁은 골목을 사이로 집들이 들어서 있고, 뒷 마당에는 포도를 비롯한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던 공간도 있었다. 집에는 부엌과 침실 등이 구분돼 배치돼 있었고, 정원을 갖춘 곳도 많았다. 벽이나 담에 그린 그림과 정교한 타일을 이용한 모자이크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폼페이 중심거리엔 아폴로 신전을 비롯한 각종 신전과 상가, 식당, 극장, 공중 목욕탕 등이 있었다. 남녀 간의 에로틱한 장면을 담은 그림이 있는 매춘부의 집도 보존돼 당시 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는데, 인기가 많아 한참 기다렸다 들어가야 했다.

큰 도로엔 마차들이 덜거덕거리며 지나가고, 집에선 여인네와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화덕에선 빵이 익고, 왁자지껄한 거리의 식당에서 포도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고, 목욕탕에서 냉-온탕을 즐기던 주민들이 뛰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치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의 폼페이 거리를 거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유적지 한쪽엔 이곳에서 발굴된 토기류와 생활용품에 대한 분류 및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화산 폭발 당시 고통 속에 죽어가던 주민의 화석 모형도 있었다.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이곳에서 얼마나 급박하고 비참한 상황이 벌어졌는지 오싹할 지경이었다.

폼페이 유적을 돌아보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특별한 유적 몇 곳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웬만한 시설을 다 갖추고 있는 도시 전체를 돌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루를 잡고 폼페이를 천천히 돌아보았고, 다음날에는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에 들러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다시 감상했다. 폼페이 유물은 나폴리 박물관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놀랄만큼 원형대로 보존된 상태였다. 2000년전의 모자이크와 그림들이 살아있는 듯했다. “폼페이는 살아있다”는 말이 실감이 갔다.
폼페이 폐허 유적에서 가장 큰 주택의 정원. 타일로 모자이크를 한 바닥과 집안의 벽에 그려놓은 벽화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당시 예술과 문화에 대한 폼페이 주민들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박물관에서의 감동은 폼페이 유적지를 돌아볼 때에 비해 훤씬 떨어졌다. 역시 유물은 보기 험하고, 낡아보이고, 볼품이 없어 보이더라도, 원래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이 엄청난 유물들을 원래의 그 자리에 두고 잘 복원하려 하지 않고, 굳이 뜯어다가 박물관에다 전시했는지 아쉬움이 남았다.

폼페이에 이어 돌아본 나폴리는 아름다운 도시라는 명성이 무색했다. 부랑자들이 많고 거리가 지저분해 불량기가 느껴졌다. 경제위기 때문인지 나폴리역 주변 구시가지의 상가 유리창이 상당수 깨져 있었고 골목엔 스프레이로 휘갈긴 낙서가 많았다.

나폴리를 돌아보다 갑자기 ‘이들의 삶의 질은 과연 어떠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경제가 성장하고, 소득이 늘어나더라도 주거와 생활환경이 악화되고, 물가가 오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람들이 더 경쟁적이고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고, 표정이 더 굳어진다면 성장은 왜 필요한 것일까. 지금의 나폴리 사람들은 2000년전 폼페이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행복할까? 나폴리를 떠나 로마로 향할 때까지도 그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그만큼 폼페이는 감동과 깊은 인상을 남겼다.

/hjlee@heraldcorp.com

<여행 메모>

여행기를 쓰고 있는 이해준 헤럴드경제 선임기자 겸 디자인포럼 사무국장은 지난해 10월12일 한국을 출발, 가족과 함께 아시아에서 유럽~남미~북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는 ’희망찾기 세계일주’를 펼쳤습니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아내와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2명, 중학생인 조카와 함께 한 이번 여행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각자의 삶과 우리 사회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았습니다. 때로는 우왕좌왕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진한 가족애와 함께 감동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들 가족의 생생한 여행 뒷 이야기는 인터넷 여행카페인 ’하루 한걸음(cafe.daum.net/changdonghee)’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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