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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책>세계적인 노(老) 석학이 현대인에게 보낸 44통의 편지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1980년 가을, 어느 수요일 저녁. 프랑스의 인기 있는 텔레비전 토크쇼에 ’비비안’이라는 여성이 수백만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남편의 조루증 때문에 부부의 성생활이 최악이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사회학자들을 흥분시켰다. 프랑스 사회학자 알랭 에른베르는 이 사건이야말로 ‘최근의 근대적인 문화혁명의 태동 시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까지 철저하게 사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성질의 정보가 바로 그 시점부터 공적인 정보로, 공적인 장이 완전히 사적인 것을 다루며 결론짓는 마당으로 변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라고 본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으로 포스트모던 이후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한 우리 삶의 기반을 설명한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동녘)을 통해 프라이버시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2010년대 개인의 사생활 침해는 자발적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바우만은 “프라이버시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하고 결코 나눠 가질 수 없는 그러한 주권이 유지되는 지대이자 바로 그처럼 주권을 지닌 사람들의 왕국이지않으면 안 되는 영역이다”고 강조한다. 소셜미디어 시대, 우리는 그런 고귀한 영역을 방어하는 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 내다놓고 선택되기를 바라고 있다. 바우만에겐 이런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 자유의 포기로 읽혀지는 듯하다. 프라이버시의 위기야말로 삶의 위기라는 절박한 표현을 쓴 것도 그런 이유다.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44통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가벼운 편지글과는 거리가 멀다. 현대인의 불안심리를 다각적으로 다룬 사회학 저서로 볼 만하다.

현대인의 불안의 정체와 허상, 놓친 것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바우만은 정보의 홍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어떻게 의미있는 것들을 선별해 내야 할지 들려준다.

그의 통찰 방법은 대상과 거리만들기. 낯설게 하기다.우리 일상에 달라붙어 있어 생각의 틈을 없애버린 존재, 사물과의 틈을 벌여 새롭게 보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편지는‘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 접속하면 언제든 매력있는 친구들이 수백명씩 널려 있는 상황에서 외외로움을 느낄 새 없을 것 같지만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는 것.

그가 말하는 고독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외모를 바꾸는 성형과 미용법 등 의학적 개입에 대한 현대인의 불안심리도 짚어낸다. 가령 주름살을 커버해 주는 보톡스, 숱이 적은 속눈썹을 풍성하게 해주는 로션에 대한 광고는 소비자 심리를 흔들어 놓는다. 끔찍한 상태를 피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게으르거나 남부끄러운 일로 간주되는 것이다. 바우만은 보톡스를 아무리 많이 쓰더라도 불안감을 쫓아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기업들은 끊임없이 이 불안감을 이용하며 비교하게 만든다.

소비행위를 약을 사는 행위, 쇼핑몰을 약국으로 비유해 소비지상주의를 설명해 나간 점도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물건을 사는 행위는 불안감의 소산이다. 새로운 상품이나 최신 물품이 나왔을 때 그것이 주는 감동을 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 혹은 과거에 얻었던 지식이나 기술을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다는 생각에 빨리 업데이트하고 점검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물건사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종플루 공포,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기, 공포에 대한 공포 등 현대인의 삶을 내모는 갖가지 불안증후군에 대한 노학자의 깊이 있는 진단은 외부보다 내면에 집중하게 한다.

바우만의 편지는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영화 ‘아마도, 악마가’ 등 다양한 장르를 빌어와 논지를 풍부하게 하며 이해에 도움을 준다.

바우만은 자신이 44통의 편지를 쓴 44라는 수에 대해서도 설명을 곁들였다. 그가 차용한 폴란드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시에 나타난 ‘44’는 자유에 대한 경외감과 희망이라는 것. 바우만은 44통의 편지를 통해 불안의 장막을 떨치고 진정한 자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로운 삶으로 나가는 길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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