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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버스토리> 대통령의 재벌 다루기
‘성장신화’ 율산, 박정희때 몰락
‘국제, 전두환 심기 건드려 퇴출
‘DJ때 ‘좌초’ 대우 아직 說분분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재벌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임금이 이따금씩 옥사(獄事)를 일으켜 신권을 견제한 것처럼, 대통령들도 임기 중 한두 차례 재벌에 칼을 휘두름으로써 그 힘을 과시했다.

최초이자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9년 율산그룹의 몰락이다. 율산그룹은 1974년 시멘트 수출로 시작해 5년 만에 그룹으로 성장했다. 적극적인 인수ㆍ합병(M&A)이 고속성장의 비결이었다. 지금도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나오고 있지만, 어찌 됐건 당시 정부에서 은행을 통한 지원의 끈을 놓아버린 탓에 몰락했다는 게 정설이다.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희생양은 국제그룹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당시 국제그룹의 부채 탓이었지만, 숨은 이유는 양정모 당시 회장이 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어쨌든 재계 서열 7위 기업을 가차없이 퇴출시킴으로써 대통령은 갑(甲), 재벌은 을(乙)이라는 관계는 다시금 분명해졌다.

이 시절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대통령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자금을 제때 그리고 기대만큼 상납하지 않거나, 대통령 주재 회의 때 지각한다는 등 사소한 이유로 인해 미운털이 박히면 기업의 생존은 끝장났다”고 회고했다.

채찍 대신 당근을 들었던 노태우 대통령 시대에는 권력의 칼날 아래 희생된 대기업은 없다. 하지만 뒤를 이은 김영삼 대통령은 대선 때 경쟁했던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에 대한 압박수위를 높여 두고두고 고전해야 했다.

노태우-김영삼 시대에 꽤 힘을 키운 재벌이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칼자루는 다시 대통령에게 넘어간다. 이해에는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 진로, 기아, 쌍방울, 해태 등 무려 10여개 그룹이 잇따라 무너진다. 정권의 칼에 의해서가 아닌 방만ㆍ부실경영이 원인이다. 무너진 기업들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의 관리 아래 들어갔다.

김대중 대통령 시대 재벌 잔혹사의 백미는 단연 재계 서열 2위였던 대우그룹이다. 대우그룹은 당시 분식회계 등 기업 내부의 치명적인 부실이 몰락 원인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이 대선에 출마하려고 해서 정권의 미움을 자초했다는 설, 미국 GM 계열사와 경쟁을 벌여 폴란드 자동차기업 FSO를 끝내 인수, 미국의 미움을 산 게 결정적인 몰락의 계기였다는 설이 난무했다. 외환위기 당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국제통화기금(IMF)의 최대주주인 미국이 한국 정부를 통해 대우그룹의 숨통을 끊었다는 설명이다.

노무현 대통령 이후 정부에 의해 쓰러진 기업은 표면적으로는 없다. 이때부터 대통령이 재벌에게 구하는 것도 정치자금이 아니라 국정운영 지지도에 도움이 될 기업 투자와 고용이 대부분이다.

대통령의 재벌 다루기도 꽤 섬세해졌다. 기업을 건드리기보다는 총수를 겨냥함으로써 국가경제에 미치는 파장은 줄이되 통제력은 높이는 방법이다. 이 때문에 총수 일가 사법처리와 뒤이은 대통령의 특별사면은 21세기 재벌정책의 새로운 공식이 됐다. 다만 최근에는 차기 대권주자들 사이에 경제사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특별사면권 남용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홍길용 기자>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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