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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를 비튼 상상력…애초부터 성군도 폭군도 없었다
내달 개봉 앞둔 ‘광해, 왕이 된 남자’
보위 지키려 대리자 세운다는 설정
폭군 광해군의 인간적 고뇌 담아

충녕대군의 이야기 ‘나는 왕이로소이다’
노비와 신분 뒤바뀐 에피소드 통해
성군 세종의 이기적인 모습 그려


냉장고가 없던 옛 시대에는 여름을 어떻게 버텼을까. 세종대왕은 왕이 되기 전부터 정말로 성군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을까. 광해군은 원래 폭군이었을까. 왜 그는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역사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상상력의 열린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상상력과 만난 역사는 이야기를 낳는다. ‘허구’는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역사와 현실로부터 출발해 삶의 진실을 품는다.

최근 개봉했거나 상영을 앞둔 한국 영화는 역사와 허구가 만나는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감독 김주호)와 ‘나는 왕이로소이다’(감독 장규성), ‘광해, 왕이 된 남자’(감독 추창민)가 그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조선시대, 얼음을 훔치려는 도둑들의 이야기를 담은 코미디 영화다. 

최근 개봉했거나 상영을 앞둔 한국 영화는 역사와 허구가 만나는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

생각해보자. 요즘같이 40도에 육박하는 최악의 폭염을 만일 냉장고 없이 버텨야 된다면? 끔찍하고 아찔하다. 예로부터 냉장고 대신 냉동시설 기능을 했던 것이 돌로 지은 얼음저장소, 즉 석빙고다.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짓고 써 왔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나 고려에서도 석빙고를 두었다는 자료가 각종 문헌에서 확인된다. 옛 사람들은 석빙고 덕에 겨울에 언 얼음을 보관해 다음 봄부터 가을까지 필요할 때마다 내어 쓸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초기에 이미 한양 내 두 곳에 석빙고를 설치했으니 서빙고와 동빙고다. 지금이야 카페에서 음료수잔에 남은 얼음조각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버려질 만큼 흔한 게 얼음이지만 당시에는 귀하디 귀한 물건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겨울에 얼음을 캐 석빙고에 보관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내어 쓰는 일이 국가적으로 큰 일이었다.

영화 속에서 왕권을 위협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좌의정 조명수(남경읍 분)는 자신의 일파와 친인척을 동원해 국가와 민간의 얼음 유통망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일종의 ‘반정’을 꾀한다. 여기에 대항해 왕권을 수호하려는 인물인 영의정은 정적의 음모로 인해 조정에서 쫓겨난다. 이를 안 영의정의 서자 덕무(차태현 분)가 복수에 나선다. 그는 조선 팔도의 내로라 하는 무인, 도굴꾼, 사기꾼, 폭파전문가, 운송의 달인 등을 모아 서빙고의 얼음훔치기 대작전을 세운다. 한뜻으로 힘을 합친 도둑들의 속내에는 얼음으로 큰 돈을 얻으려는 속셈도 있지만, 간신배인 조명수를 무너뜨리고 부정과 비리를 바로잡아 왕권과 어린 세손을 지켜내려는 명분도 내세운다.

그렇게 허구는 역사와 ‘접붙이기’가 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은 조선조 영조 치하로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이후이며 훗날 정조가 되는 어린 세손이 당쟁의 표적이 되고 있는 때다. 도둑 일당 중 폭탄 제조 전문가를 따라다니는 영특한 소년(천보근 분)이 있는데, 훗날 정조에게 발탁돼 큰 업적을 남긴 역사적 실존 인물이 되는 것으로 설정됐다. 소년은 ‘정군’으로 불린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그 성(姓)에서 소년이 누구인지 이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 시대 실학의 거두가 되는 정 씨 성의 학자 말이다. 

장규성 감독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즉위 석 달 전 세자 시절의 세종, 즉 충녕대군의 이야기다. 실제 당시의 기록은 문헌에도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착안해 숨겨진 시간에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높은 학문과 업적을 이룬 성군으로 꼽히지만, 영화는 세자 시절의 세종을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책에만 빠져있는 심약하고 이기적인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태종이 큰아들인 양녕 대신 학식이 높은 충녕을 세자로 세우자, 정치에 무관심하고 왕노릇이 죽기보다 싫었던 충녕은 궐 밖으로 탈출한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자신과 외모가 똑같은 노비를 맞닥뜨리고 서로 신분이 뒤바뀐다. 노비로 오해돼 궁 밖 험한 세상을 떠돌던 충녕은 점차 성왕의 자질과 마음가짐을 갖춰간다. 다음달 개봉을 앞둔 이병헌 주연의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성군이 되려했으나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상처와 당쟁의 거센 회오리바람 속에서 정치적 표적이 된 광해가 보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닮은 광대를 대리자로 내세운다는 발상을 담았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왕자와 거지’의 아이디어로 역사를 뒤틀었고, ‘광해’는 가케무샤(影武者ㆍ일본 중세시대에 영주들이 적으로부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내세운 가짜 무사)의 발상으로 우리 역사에 상상력을 보탰다.

역사는 실존했던 인물의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을 기록한다. 반면 허구는 ‘실제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나는 왕이로소이다’ ‘광해’는 역사적 기록의 ‘틈새’에서 상상력으로 길어올린 거짓 이야기지만 부정한 자들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바람, 민중들의 삶을 위하는 지도자에 대한 열망, 누구도 알 수 없었던 한 개인의 인간적 고뇌를 담았다. 그것 또한 거짓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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