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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림막 뒤 뭐가 있나?…보란듯이 비틀다, 고정관념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작가 3인의 전시회
구동희 ‘헬터 스켈터’
폐쇄된 미로·앵앵거리는 모깃소리
낭만과는 거리 먼 구조물과 사운드

이미경 ‘가림막’
가림막 뒤엔 ‘아무것도 없었다’
일상화된 재건축의 허무한 역설

잭슨 홍 ‘대량 생산’
1.5배 확대된 낯선 오브제들
쇠락한 20세기에 대한 오마주


세계적인 럭셔리 기업 에르메스가 후원하는 ‘에르메스 미술상’은 혁신적인 개념미술을 하는 한국 작가 사이에 ‘로망’으로 통한다. 명품 기업이 해마다 유망 작가 3명을 선정해 상당액의 작품제작비를 지원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상(賞)을 주다 보니 후보에 뽑히길 앙망하는 이들이 많다.

올해로 13회째인 이 미술상의 최종 후보로 구동희, 이미경, 잭슨 홍이 뽑혔다. 이들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개막된 ‘2012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전시’에 야심 차게 준비한 신작들을 출품했다. 세 작가의 작업은 일반의 고정관념을 보란 듯이 깨뜨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먼저 구동희는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 연작을 출품했다. ‘헬터 스켈터’는 비틀스 노래의 제목이자, 나선형의 놀이기구를 뜻하니 ‘낭만적인 작업이겠군’ 하고 기대를 품어보지만 관객을 기다리는 건 정반대의 작품이다. 작가는 여름철 모기를 쫓는 데에 쓰는 둥근 모기향을 깔때기처럼 연결해 전시장 천장에 내걸었다. ‘나선형 미끄럼틀’ 또는 ‘허둥대는 심리상태’라는 헬터 스켈터의 사전적 의미에 착안한 설치작업이다. 또 사각의 검은 유리를 이어붙여 어두운 미로를 만들었다. 검은 방 안쪽으로 빙빙 돌아들어 가면 앵앵거리는 모깃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작품명은 ‘CII 966 856’. 폐쇄된 미로와 사운드가 결합된 일종의 사운드 설치작업인 셈.

구동희는 1960년대 미국에서 이교집단을 이끌며 살인을 일삼았던 찰스 맨슨에 주목했다. 비틀스의 ‘헬터 스켈터’에 심취했던 맨슨의 불가사의한 심리를 미로형 구조물과 모기향 깔때기로 은유하고 있다. 또 각종 음모론이 유행병처럼 번지며 대중을 혼돈에 빠뜨리는 것처럼 기이한 오브제와 사운드로 관객의 감각을 분산시키고 있다. ‘CII 966 856’은 맨슨이 수감된 방 번호다.

설치미술가 이미경의 작업 또한 범상치 않다. 작업을 위해 을지로와 청계천을 자주 오가는 그는 ‘가림막(Fence)’ 작업을 선보였다. 평소에도 가림막에 관심이 많은 그는 가림막이 도시 환경을 어지럽히는 곳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지만, 재건축이 일상화된 이 땅에선 일종의 ‘감정적 기호’라고 본다.
 
올해로 13회를 맞은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의 최종 후보 3인의 출품작. 모기향을 이어붙여 커다란 깔때기를 만든 구동희의 설치작품 ‘헬터 스켈터’(왼쪽), 전시장에 가림막을 설치해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미경의 ‘Fence’(가운데), 실제보다 큰 달걀을 만들어 굴러내릴 듯 설치한 잭슨 홍의 ‘시험장’.

이미경은 “에르메스 미술상의 최종 후보에 선정됐다니까 모두 ‘어떤 작업을 할 건데?’ 하고 끈질기게 물어보더라. 그래서 일부러 거꾸로 갔다. 가림막을 설치해 아무것도 안 보여주는 쪽으로 말이다”라고 밝혔다.

가림막 앞에 작가는 작은 디딤돌을 놓아 ‘안에 뭐가 있지?’ 하고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사람들은 ‘뭐야?’라며 수군거리게 된다. 당연히 뭔가 있을 거라 믿었지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내 작업을 본 관람객들이 집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못 보고 왔다’고 얘기하면 맞는 거다. 특별한 걸 기대했는데 그냥 돌아가는 허무한 설정이 내 작업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 과감한 역설이 흥미롭다.

잭슨 홍은 ‘대량 생산’이란 제목 아래 각종 오브제 및 설치작품, 평면작업을 내놓았다. 실제 크기보다 1.5배 정도 확대된 오브제들은 작은 성요셉상, 기도하는 천사상, 푸른 계란판과 계란 등이다. 이들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나 낯선 형상으로 좌대에 놓여졌다. 먼지를 빨아들여야 할 진공청소기가 마네킹을 빨아들이는 등 상황 또한 엉뚱하다.

잭슨 홍은 “어느새 쇠락해버린 20세기 문명을 오마주한 내 작업은 움직임의 한순간을 슬쩍 포착한 농담 같은 것”이라며 “1.5배로 사물을 확대한 것은 그 크기가 가장 낯설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종 수상자는 오는 9월 13일 발표하며, 전시는 9월 25일까지 이어진다. (02)544-7722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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