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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전기사 출신 지점장’ 기업은행 이철희 씨…“꿈은 이뤄진다”
[헤럴드경제= 최진성 기자]‘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19일 오전 6시50분. 이른 아침부터 송대관의 ‘해뜰날’이 들려온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놀이터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중년의 남성. 혼잣말로 부르는 그의 노래소리가 조용히 잠든 동네를 깨운다.

“왠만해선 슬프거나 우울한 노래는 부르진 않아요. 해뜰날을 부르니까 정말 쨍하고 해뜰날이 오더라구요.” 힘찬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항상 감사하면서 삽니다. 회사에 감사하고, 가족에게 감사하고, 고객에게 감사하고….”

서울 신당동 일대를 안방 삼아 돌아다닌지 벌써 22년째다. 늘 같은 시간에 출근해 같은 일을 하지만 마음가짐은 항상 새롭다. “‘내가 이 회사의 주인이다’라는 생각만 갖고 있으면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제대로 알 수 있어요.” 그는 오늘도 건물 보일러를 점검한다. 보일러공 업무를 손 놓은지 14년이 됐지만….

고졸 신화를 넘어 은행권에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 운전기사 출신 최초 지점장. 이철희(53) IBK기업은행 서울 신당동 지점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점장은 은행원의 꽃으로 불린다. 연공서열로 되는 게 아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는 자만 ‘꽃’이 될 수 있다.



▶운전기사 이철희= ‘신당동 지점장 이철희.’ 또 승진했다. 출장소장이 된 지 6개월만이다. 지난 12일 인사에서 지점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그가 근무하던 신당동 출장소는 수신 기반이 확대돼 지점으로 승격됐다.

“운전기사는 별정직이예요. 구조조정 대상 0순위죠. 별정직이 은행원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그런데 이제는 지점장이라니….”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정년 2년을 앞두고 30년간 품어온 꿈을 이룬 것이다. ‘꿈은 이뤄진다’는 2002년 한ㆍ일 월드컵의 응원 캐치프레이즈가 가슴에 와닿는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으로 운전기사가 됐다. 1983년 9월 군 제대 후 막노동을 하면서 따놓은 운전면허증으로 기업은행에 입사했다. 말이 좋아 입사이지 당장 그만두라고 하면 짐을 싸서 나가야되는 서무원이었다.

180㎝가 조금 넘는 큰 키와 65㎏의 마른 체격, 밝고 시원한 인상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은행장 비서실과 잘 어울렸다. 나이는 가장 어렸고 운전면허증을 딴지도 얼마되지 않았다. 문제는 중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살기는 했지만 실제로 서울 생활을 한지는 1년여밖에 안돼 서울 길에 까막눈이었다는 점이다.

“신라호텔로 가자고 하면 롯데호텔로 갔고, 바로 옆에 있는 롯데호텔로 가자고 하면 길을 몰라 한참을 헤맸죠. 그래서 작정하고 한동안 매일 밤새도록 운전하면서 서울 길을 익혔죠. 지금은 내비게이션 못지 않게 길을 잘 알죠.”

7년간 비서실장 7명의 출퇴근 길을 책임지면서 은행원에 대한 꿈은 더욱 간절해졌다. “은행에 들어갈 때부터 꿈을 꿨죠. 꼭 3년 안에 은행원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운전기사로 은행원이 되기 힘들다면 다른 방법을 통해 내 꿈을 펼쳐보이겠다고 다짐했죠.”

마음은 콩 밭에 있었지만 운전기사의 직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비서실장의 취향에 맞게 음악 하나까지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했다. “당시에는 테이프로 음악을 들었죠. 내가 모신 분이 좋아하는 노래만 따로 녹음해서 이동하는 동안 그 음악을 틀곤 했죠. 퇴임하실 때 모두 제 팬이 돼 있더라구요.”



▶기술계 은행원 이철희=어깨 너머로 보이는 은행원 생활은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베테랑 운전기사로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결코 은행원의 꿈은 버릴 수 없었다. “계속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빨리 은행원이 될 수 있을까. 길은 하나 뿐이더라구요. 국가공인자격증을 따서 기술계 은행원이 되는 것이었죠.”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는 수행 일정 속에서도 틈틈히 자격증 공부를 했다. 그래서 취득한 열관리기능사자격증. 1990년 10월 은행원이 되는 두번째 걸음을 내딛었다. 기업은행 서울 성동지점 보일러공. 서무원에서 별정직이 되기까지 7년이 걸렸다.그의 임무는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였다. 그래도 객장과 창구가 있는 영업점에서 근무하고 은행 업무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 행복했다.

날이 갈수록 지점이 커지고 고객이 늘자 일손이 모자랐다. 그가 객장에서 해야할 일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휴지 줍는 일부터 흐트러진 의자를 바로 놓는 일, 커피를 타주고 차례를 기다리는 고객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일이라도 꾸준히 계속 했다. 그러면서 지점장과 동료 직원들의 신임을 받았고, 은행 보조 업무를 배우게 됐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혔다. 은행원이 아닌 이상 제대로 된 은행 업무를 맡을 수 없었다. 기술계 은행원이 되기 위해선 기능사자격증이 아닌 기사자격증이 필요했다. 가방 끈이 더 길어야 했다. 그래서 야간 전문대학 사무자동화학과를 다녔다.

당시 귀하디 귀한 컴퓨터를 공부했고 영업점에서 제대로 먹혔다. 자기만큼 컴퓨터를 아는 직원이 없어 은행원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쳤다. 자연히 친분은 쌓였고 맡은 일도 많아졌다.

1998년 8월. 드디어 기술계 은행원이 됐다. 별정직에서 은행원이 되기까지 8년이 걸렸다. 다만 ‘기술계’라는 꼬리표 때문에 제대로 된 은행 업무는 볼 수 없었다. 대신 영업점 살림을 짊어지는 총무가 됐다. “온갖 궂은 일을 거리낌없이 도맡았어요. 비록 기술계 은행원이었지만 행복하고 감사했어요. 밥값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야유회, 체육대회, 회식 등 각종 행사를 제가 다 준비했어요. 지점장은 물론 동료 직원들이 모두 좋아하더라구요.”



▶외환위기 그리고 감원 한파=어렵게 기술계 은행원이 됐지만 이번에는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라는 국가부도 사태가 왔다. 뒤이어 구조조정 후폭풍이 몰려왔다. 은행권도 예외일 수 없었다. 퇴근하기가 무서울 정도로 동료 직원들의 테이블이 줄줄이 사라졌다. 이들은 모두 이 지점장과 같은 별정직 출신이다. 말이 좋아 구조조정이지 회사에서 쫓겨났다.

“정식 은행원도 퇴출되는 마당에 별정직이 별 수 있겠습니까. 분위기가 살벌했죠. 다행히 저는 구조조정 명단에서 제외됐어요. 당시 지점장이 ‘너는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라’고 말해줬어요. 얼마나 기뻤던지….”

감원 한파는 이후에도 1~2차례 더 불었다. 그때마다 이 지점장은 살아남았다. “조직에 대해 정말 감사했습니다. 주인 정신이 생겼고 더 열심히 일하게 됐죠. 남들이 저보고 성동지점 건물주라고 놀리기도 했어요. 그만큼 회사를 사랑하게 됐죠.”

위기를 기회로 삼아 또다시 자격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엔 4년제 대학교에 들어갔다. 기술 자격증은 물론 금융자산관리사, 선물거래상담사 등 금융 자격증도 땄다. 지금까지 취득한 자격증 수만 9개에 달한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뭐든 열심히 했어요.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지만 아침과 밤에는 학교 공부를 했죠. 사업으로 성공한 친구들이 ‘이런 생활로 사업을 했다면 출세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정식 은행원 이철희=2002년 1월. 기업은행에 첫 발을 내딛고 은행원의 꿈을 꾸고 은행에 들어온지 20년만에 정식 은행원이 됐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대리’가 됐지만 갓 취업한 사회 초년생마냥 뛸 듯이 좋았다. 동료 은행원들이 자신의 업무를 조금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여전히 ‘보일러공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긴 했지만 고객 응대를 하는 업무가 천성으로 느껴졌다.

“고객들을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어요. 먼저 다가가고, 먼저 손 내밀고. 길거리 노숙자와도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열정이 넘쳤죠. 실적은 저절로 쌓였어요. 고등학교 선생님을 상대로 한달에 신용카드 회원을 250명이나 유치하기도 했죠.”

2005년 책임자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면서 과장이 됐고 2010년에는 차장이 됐다. 은행원의 관록이 조금씩 묻어났지만 초심을 잃지 않았다. 여전히 오전 7시 전에 출근하고 보일러를 틀어 은행을 따뜻하게 데우고 신당동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아직 기업은행이란 이름이 생소하던 2009년에는 금융지주회사 계열의 은행과 경쟁해 재개발아파트 집단대출 500억원을 유치했다. 다른 은행 고객이었던 한 기업체 간부는 1년여간 이 지점장을 지켜봤다면서 선뜻 500억원을 기업은행에 예치하겠다고 건넸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조준희 기업은행장이 이를 놓칠리 없다. 이 지점장의 경력과 실적, 평판을 꼼꼼히 살펴봤다. 파격 인사의 ‘시범 케이스’로 안성맞춤이었다. 조 행장은 지난 1월 인사에서 당시 차장이던 이 지점장을 부지점장으로 승진 발탁하고 그가 22년간 뛰어다닌 신당동 출장소를 맡겼다. 그리고 지난 12일. 통상 4년 걸리는 지점장에 다시 한번 ‘이철희’ 이름을 올렸다.

이 지점장은 시범 케이스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사내ㆍ외 행사에 연사로 초청돼 인생 역전의 삶을 소개하고, 신입행원들의 멘토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지방 영업소에 청원경찰로 있다가 자신의 얘기를 듣고 도전해 은행원이 된 후배 직원도 만났다.

“저 같은 사람을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조직이 깨어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운전기사에 불과했던 저를 이렇게까지 대우해 줄 수 있겠어요? 택도 없는 일입니다. 제가 기업은행에 감사할 수밖에 없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할 동료가 밀려난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도 듭니다.”



▶고졸 신화를 넘어=이 지점장은 전남 영암종합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고졸 출신 은행원이 많았지만 이들은 덕수상고, 선린상고, 경기상고 등 서울 명문 상업고등학교 출신이다. 대학교로 따지면 지방대와 스카이(서울대ㆍ고려대ㆍ연세대) 차이다.

이 지점장은 그러나 단 한번도 ‘은행원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운전기사로 기업은행에 들어왔지만 ‘내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다졌다. 별정직에 대한 차별과 지방 고졸 출신의 서러움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강해졌다.

“제 소개를 할 때 저는 ‘미나리’ 같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미나리는 항암 효과가 뛰어나죠. 그만큼 저항력이 강하죠. 제가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상황은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다짐했고 해내고 말았습니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남들보다 덜 자고 더 뛰었다. 아플 겨를도 없었다. 아침에 집중력이 가장 좋은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으로, 이 시간에 공부하고 기도하고 하루의 계획을 세운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적극성과 남들이 신경쓰지 않는 부분까지 챙기는 세심함으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어갔다. 여기에 겸손함까지 겸비했다. “집에서 나올 때 항상 감사하며 살자, 겸손하게 살자, 배려하며 살자고 스스로 기도를 합니다. 돈 없고 백 없는 시골 촌놈이 이 정도로 살고 있는 건 기적이 아닌가요?”

업무에서도 마찬가지다. “은행원이라고 해서 ‘갑’이라는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떡볶이 가게가 잘돼야 은행도 잘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고객이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도 금물입니다. 고객이 찾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2년 후면 정년이다. 그는 지금까지 받은 것을 베풀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기업은행에서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퇴직 후에 할 일도 여기서 고민해봐야겠지요. 뭔가 되겠다는 것보다 저 같은 사람들이 큰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ipen@heraldcorp.com

사진=김명섭 기자/ msir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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