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무서운 전쟁이다. 그런데 총성도 국경도 없다. 공격 표적은 국가, 기업, 개인을 가리지 않는다. 네트워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공격 위험에 무방비나 다름없다. 핵폭탄이나 생화학무기도 안 통한다. 공격은 매우 빠르고 은밀하지만,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다. ‘간 큰’ 해커 한 명이 맘만 먹으면 국가기간망을 송두리째 마비시켜 국가 비상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수법은 갈수록 정교해지는데 공격자는 파악하기 어려울뿐더러 공격당해도 보복이 쉽지 않다. 방어가 곧 최선의 공격이란 뜻이다.
육상, 공중, 해상, 우주에 이어 제5의 전장(戰場)으로 떠오른 사이버 공간이 인류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꿔놓고 있다. 스크린이나 소설 속의 허구가 현실이 된 건 오래전 얘기다. 전자금융망 공격쯤은 낱낱이 헤아리기 힘들다. 지난달 초 미국 싱크탱크인 신미국안보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미 국가기관 전산망은 한 달에 약 18억회 사이버 공격을 받는단다. 얼마 전엔 세계 최대 방산업체 미 록히드마틴의 전산망이 해킹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쯤 되면 지금 지구촌 어디선가 사이버전이 진행형이란 추측도 터무니없지 않다.
국가 간 사이버전쟁사는 꽤 긴 편이다. 그 첫 장은 지난 1991년 1차 걸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특수공작원을 통해 이라크 방공시스템에 컴퓨터바이러스 칩을 심었다. 러시아는 2007년 에스토니아, 2008년 그루지야(현 조지아)를 잇달아 사이버 공격했다. 지난해 9월 이란 원전시설을 마비시킨 ‘스턱스넥(Stuxnet)’은 사이버전의 진일보를 알린 획기적인 사건이고, 배후로 얼마 전 미국이 지목되기도 했다. 러시아 언론 RT는 이를 두고 미 정부는 자국에 대한 공격을 강력 비난하면서도 다른 국가를 공격하는 이중성을 정당화해야 하는 곤경에 처해 있다고 보도했다.
이 밖에 북한의 디도스 공격, 한국 누리꾼들의 독도 수호를 위한 ‘사이버 임진왜란’ 등 먼 나라 얘기도 아닐뿐더러 국가, 개인의 전투력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다 보니 각국은 암암리에 사이버 무기 개발 및 안보 우산 가동 등에 여념이 없다.
사이버 전력 최강국으로 알려진 미 정부는 1억1000만달러를 들여 사이버전에 대비한 사이버지도 제작 등 ‘플랜X’ 프로젝트에 착수했고, 이란ㆍ북한을 겨냥해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는 ‘그림자 인터넷(shadow internet)’ 계획을 추진 중이다. 중국은 상당한 규모의 사이버부대를 운용하는 것은 물론, 민간 해커들의 서방세계 해킹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중국의 ‘전자전 부대’는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출신 등 우수 인재 2000여명이 배속돼 해킹기술 연구와 외국 정부기관의 주요 정보를 빼내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대통령 사이버안전특보를 지냈고 ‘사이버 전쟁’이란 책을 쓴 리처드 클라크는 지난 4월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중국은 어떻게 우리 기밀을 훔쳤나’라는 글에서 “중국 해커들이 미 기업 컴퓨터에 침입해 많은 지식재산을 훔쳐가고 있다…한 기업은 10억달러나 투자한 개발 프로젝트 데이터를 하룻밤에 몽땅 해킹당했다…게다가 해킹당하고도 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보안회사 맨디언트는 고객사의 94%가 당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각국의 사이버전을 두고 공격이 또 다른 공격을 부르는 악순환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글로벌 안보전문가 스콧 켐프 프린스턴대 우드로윌슨 스쿨 교수는 미 일간 시카고트리뷴에 “미국이 야심찬 사이버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적들과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노출된 채 쓸모없는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면서 “이미 루비콘 강을 넘은 미국은 이제 파괴적인 사이버 무기와 강력한 방어체제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지나친 사이버 안보 경쟁이 국민의 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있다. 미국은 연방수사국(FBI)이 불법복제 혐의로 메가업로드를 폐쇄하고, 창립자 김닷컴을 기소하면서도 사이버테러 방지를 위한 사이버정보공유법안(CISPA)으로 미국민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고 RT는 지적했다. 하지만 리처드 클라크는 “프라이버시나 인터넷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주장 때문에 오바마 정부가 산업스파이를 막을 방안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바람에 미국 정부는 중국의 연구·개발(R&D)을 도와주는 꼴이 됐고 미국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온라인 쇄국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각국 공동 대응도 눈에 띈다. 군사교류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중국, G2 간 모의 사이버 전쟁을 치렀다는 영국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사이버 공간 역시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셈이다.
<김영화·한희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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