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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새천년민주당 미국식 첫도입…2007년엔 ‘동원 논란’도
한국 오픈프라이머리 역사는…
한국정치에서 오픈프라이머리의 역사는 10여년 정도로 짧지만 내용을 보면 굵직하다. 오픈프라이머리는 내리 두 번의 대선(16대ㆍ17대)에서 모두 역사를 바꾸는 ‘원초적 힘’으로 작용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패한 2007년 새누리당 경선,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초반 약세를 뒤집고 대통령의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모두 오픈프라이머리가 크게 작용했다.

우리 정치권이 이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16대 대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이하 민주당)이 국민경선제를 전격 도입하면서 일반 유권자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02년 민주당이 최초로 선택한 방식은 국민 50%와 당원ㆍ대의원 50%를 혼합한 제도였다. 새누리당 전신 한나라당의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대세론’이 한창 주가를 날리던 때였다. 당시 민주당은 당내에서는 ‘이인제 대세론’이 강했으나 이대로는 힘들다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 이에 미국식 오픈프라이머리를 전격 도입하면서 반전을 꾀했다.

국민경선제 도입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열세 후보라는 초반 분위기를 깨고, 울산과 광주에서 내리 이인제 후보를 꺾으며 예상을 뒤집었다. 여기에는 ‘노사모’라는 자발적인 인터넷 팬클럽이 큰 힘이 됐다. 특히 전체 7만명의 대의원 중 3만5000여명이 배정된 공모대의원에 무려 184만명에 달하는 유권자가 응모해 경쟁률이 48대 1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에는 국민참여경선제의 부작용만 부각됐다. 민주당의 경우, 정동영 후보 측의 ‘동원 논란’으로 경선 기간 내내 시끄러웠다. 이 때문에 손학규 후보 측이 경선 일정을 중단하기도 했다. 손 후보 측 불만은 여론조사에서 앞서 있는데, 국민참여 경선에서는 정 후보 측의 조직이 대거 개입해서 여론을 왜곡했다는 것이었다.

반면 한나라당의 경우는 당원ㆍ대의원ㆍ현장투표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서 이명박 후보가 이기면서 최종후보로 선출됐다. 바로 전화 여론조사 1표가 현장투표 30표와 맞먹는 표의 등가성 문제 때문이었다. 

양대근 기자/bigroo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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