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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궐남’, ‘국민 남편′, ‘첫사랑’, ‘납뜩이’, ‘네 가지 없는 남자’-시청자ㆍ관객들을 울리고 웃긴 캐릭터
‘강마에(2008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가 “똥덩어리!”를 외칠 적에 더 이상의 마성의 캐릭터는 없으리라 여겼는데, 이듬해 여름 “이제 미실의 시대이옵니다” 한마디에 대한민국의 월·화요일 밤 안방은 ‘미실(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의 천하로 바뀌었다. ‘잘금4인방(2010년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의 풋풋한 로맨스에도 가슴이 설렜지만, 똥지게를 짊어진 채 “빌어먹을!”이라는 삿된 말을 입에 올리는 미중년 ‘세종(2011년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모습도 눈물 나게 멋있었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처럼 올 상반기에도 새롭게 진화한 캐릭터들이 저마다 새로운 매력을 뽐내며 과거의 잔상에 지우개를 들이댔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예상은 이번에도 즐겁게 배반당했다. 올 상반기 시청자와 관객들을 울리고 웃게 만든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되짚어 본다.



- 「해를 품은 달」 ‘이훤’

“미혹됐다. 허나 떨칠 수가 없구나.”

극중 사랑해선 안 될 여인 무녀 ‘월(한가인 분)’에게 마음을 빼앗긴 왕 ‘이훤(김수현 분)’의 독백은 ‘팬심’의 또 다른 말이기도 했다. 세상을 떠난 첫사랑을 마음에 품은 채 중전과의 합방을 거부하는 까칠하나 감성적인 왕의 상반된 매력은 순정에 목마른 여심을 절묘하게 자극했다. 때로는 노회한 중신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남자의 모습을, 때로는 내관에게 농을 치며 장난을 거는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면적인 캐릭터 앞에서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감히 내 앞에서 멀어지지 마라. 어명이다”라며 눈물을 글썽이다 “내가 잘 생긴 건 잘 안다만 그만 쳐다보거라”라고 너스레를 떠는 ‘차궐남(차가운 궁궐 남자)’의 매력을 거부하긴 쉽지 않았을 터이다. 이훤은 남들에겐 능력 있고 당당한 ‘나쁜 남자’이지만 자신에게 만큼은 ‘순정파’라는 여성들의 판타지 그 자체였다. ‘이훤앓이’를 자처한 시청자들에 힘입어 ‘해를 품은 달’은 시청률 40%를 돌파하며 국민드라마 반열에 올랐다. 



- 「넝쿨째 굴러온 당신」 ‘방귀남’

“어머니. 앞으로 아내를 혼내실 땐 저도 함께 불러서 혼을 내주십시오.”

‘국민 여동생’, ‘국민 남동생’이라는 수식어는 있었지만 ‘국민 남편’은 처음이다. ‘방귀남’ 이 남자, 잘생긴 외모와 상냥한 말투에 아내의 불편한 심기 파악은 기본 옵션이다. 시누이들에게 시집살이로 고초를 겪는 아내를 위해 누이들을 노래방으로 불러 정중히 부탁하고, 제삿날 음식을 만들기 위해 앞치마까지 맨다. 직업도 고소득 전문직인 종합병원 의사에, 처가 식구들에게도 끔찍하게 잘한다. 이 남자, 아내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별이라도 따다줄 듯하다. 지금껏 이런 남편 캐릭터는 처음이다.

남편은 ‘남의 편’의 준말이라고 자조해온 전국의 수많은 아내들이 주말 저녁이면 가려운 곳만 골라 신통방통하게 긁어주는 이 남자 얼굴을 보기 위해 각 잡고 채널 고정이다. 같은 시간 남편들은 브라운관 앞에서 참으로 작아진다. “당신이 김남주처럼 예쁘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외쳐보고 싶지만 반항은 소심하게 목울대에서만 맴돈다. “당신이 유준상처럼 잘 생겼냐?”, “방귀남처럼 돈이라도 잘 버냐?”는 반격에 본전도 찾지 못할 테니 말이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후폭풍은 길게 이어질 듯하다.



- 「건축학개론」 ‘서연’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나도 혹시 수지의 첫사랑?”

‘국민 남편’에 이어 ‘국민 첫사랑’까지 등장했다. 여심을 자극했던 기존의 멜로물과는 달리 ‘건축학개론’은 남성 관객들의 높은 호응에 힘입어 흥행에 성공을 거뒀다. 그 중심엔 걸그룹 미스에이의 멤버 수지가 연기한 여주인공 ‘서연’이 있었다.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와 단정한 블라우스만으로도 청순가련한 첫사랑의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서연’은 마냥 청순가련하진 않았다. 그 나이 대 여대생이 쓸법한 말투를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서연’의 모습은 이상화된 첫사랑의 전형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첫사랑이 ‘서연’과 닮았던 닮지 않았던 간에, 영화를 감상한 남성 관객들의 날카로운 첫사랑의 추억과 상대방은 어느새 ‘서연’으로 치환돼 있었다. 또한 삐삐, CD플레이어, 공중전화, 전람회의 노래 등 90년대를 관통하는 아이콘들은 그 시대에 청춘을 보낸 30~40대 남성들에게 애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관객몰이에 힘을 더했다. ‘서연’ 그 자체였던 수지는 ‘건축학개론’의 최대 수혜자다. 이제 대한민국 오빠들은 ‘수지’라고 쓰고 ‘첫사랑’이라고 읽는다.



- 「개그콘서트-네가지」 김준현

“그래 나 뚱뚱하다! 하지만 귀엽지? 안 고뤠?”

김준현은 각종 개그 프로그램에서 감초 수준으로 면면이 이어져온 ‘돼지’ 캐릭터를 주연급으로 격상시킨 주인공이다. ‘개그콘서트’의 ‘비상대책위원회’ 코너에서 “고뤠?”를 전 국민적인 유행어로 만들며 인기몰이를 시작한 그는 ‘네가지’를 통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무사안일하지만 “사람 불러야겠지?”란 능청스런 말투로 아랫사람 지적에 바로 수긍해버리고 마는 ‘비상대책위원회’의 장군 캐릭터도 밉지 않고 귀여웠다. 그런데 살 빼겠다며 머리를 숙이는 소심한 태도 대신 당당하게 “그래 나 뚱뚱하다!”를 외치는 ‘네가지’의 ‘뚱뚱이’ 캐릭터는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멋있어 보이기까지 하다. 콤플렉스를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드러내고 비뚤어진 시선과 차별을 향해 큰 소리를 치는 김준현의 모습은 숨죽이고 있던 대한민국의 ‘네가지’들을 유쾌·상쾌·통쾌하게 만들었다.



- 「건축학개론」 납뜩이·「더 킹 투 하츠」 은시경

“그 배우가 그 배우라고? ‘납뜩’이 되니?”

영화 ‘건축학개론’의 느물느물한 재수생 ‘납뜩이’와 드라마 ‘더킹 투 하츠’의 융통성 없는 순정파 왕실 근위대장 ‘은시경’. 두 캐릭터 사이의 간격은 이를 연기한 배우가 동일인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컸다.

‘건축학개론’에서 친구에게 엉터리 연애 비법만 전수하는 재수생 ‘납뜩이’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관객들은 폭소했다. 펑퍼짐한 힙합 바지에 무스로 어설프게 흉내 낸 ‘올빽머리’는 학창시절 주변에 꼭 한 두 명 쯤은 있을 법한 친구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납뜩이’의 허영기와 잘난 척은 친근하기만 했다.

그런데 “싱숭이, 생숭이”, “아구창을 날릴까?” 등 주옥(?) 같은 대사들을 쏟아내던 ‘납뜩이’가 ‘은시경’이라니. 하나마나한 공약(空約)과 배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말 대신 행동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순정을 바치고, 섬기는 이에게 충성을 다하는 ‘은시경’의 모습은 ‘납뜩이’를 먼저 접한 이들에게 있어 그야말로 배신에 가까웠다. 주연 이상의 ‘미친 존재감’으로 안방극장을 뒤흔든 ‘은시경’은 극중 죽음으로써 물러나는 마지막 모습까지 강렬했다. 상반된 매력의 두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배우 조정석은 올 상반기 단 두 편만으로 스타덤에 오르며 충무로와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정진영 기자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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