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수난의 역사’
사법부의 수난사는 깊다. 권력의 총칼 앞에 맞서 위엄을 지키려 했던 판사는 옷을 벗거나 친척집으로 피신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일신의 안위를 바랐던 일부 판사는 정권의 입맛대로 판결하며 야합하기도 했다.▶2명이 사망한 첫 법원 소요=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법원사’에 따르면 광복 후 최초의 법정 소요는 미 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첫 공판이다. 조선정판사는 일제시대 조선은행권을 인쇄했던 곳으로, 광복 후 조선공산당이 인수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정판사에 남아있던 화폐 원판으로 1200만원 상당의 위조지폐를 찍어냈다.
이 사건에 대한 첫 공판 때 조선공산당 측이 동원한 군중은 법원 구내에서 노래를 부르며 돌팔매질을 해댔다. 무장경관의 진압과정에서 시위대 2명이 숨질 정도로 이날의 소요는 격렬했다.
▶“담당판사 압살하라”= 1952년 5월 부산시내에는 “담당판사를 타살ㆍ압살하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서창선 육군 대위와 총격 과정에서 서 대위를 살해한 서민호 의원을 석방한 것에 대한 비난이었다.
당시는 직선제 개헌안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충돌하던 때였다. 정치적 상황상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로는 재집권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한 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이 절실했다. 서 의원은 이에 맞서 내각책임제 개헌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부산지방법원이 서 의원의 구속집행을 정지하자 시위대가 법원 청사로 몰려와 담당 판사를 죽이라고 외쳤고, 판사의 하숙집은 습격을 받았다. 재판을 담당했던 안윤출 부장판사는 처가로 몸을 피해야 했다.
▶무장한 채 법원 휘저은 군인= 군사정권기에도 사법부에 대한 간섭은 계속됐다.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한창이던 1964년 5월 서울형사지법 양헌 판사는 시위를 벌인 대학생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러자 다음날 새벽 권총과 칼빈 소총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 13명이 법원당직실 문을 박차고 난입했다. 이들은 “영장을 기각한 판사가 누구냐”며 으름장을 놓고는 양 판사 집까지 찾아가 “여기서 수류탄을 까고 죽자”는 식으로 난동을 피웠다.
김성훈 기자/paq@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