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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여름 새로운 영감이 필요하다면 ‘카셀’로 떠나라
<이영란 기자의 아트&아트= 카셀 도쿠멘타13 현장탐방기③>

밤 10시가 넘어서야 해가 뉘엇뉘엇 지는 독일 중부의 소도시 카셀(Kassel).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2시간반 거리(북쪽)에 위치한 이 작고 유서깊은 도시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현대미술제 ‘도쿠멘타13(dOCUMENT 13)’이 지난 6월 9일 개막됐다. 오는 9월16일까지 장장 100일간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이 야심찬 미술제로 인해 카셀은 도시 전체가 ‘100일간의 미술관’으로 탈바꿈한다. 고즈넉하게 침잠해 있던 도시에 일대 활기가 이는 것.

그런데 이 미술제를 두루 참관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도심 광장과 미술관, 각종 박물관, 궁전 정원, 기차역과 호텔은 물론이고, 깊은 숲속과 호숫가, 급경사의 테라스, 심지어 지하 벙커에까지도 작품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워낙 설치된 미술작품간 동선이 길고, 출품작의 규모와 수자가 방대해 끈기가 없다면 금새 지치게 마련이다.



나치시대 유물인 도심 절벽의 지하벙커를 활용한 설치및 영상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선 주최측이 빌려주는 안전모를 반드시 써야 한다. 카를사우에 숲 속 곳곳에는 작품들이 워낙 띄엄띄엄 설치돼 있어 주최측은 자전거를 타고 감상할 것을 권하고 있다. 자전거 대여소도 마련돼 있다. 따라서 이 도쿠멘타 전반을 충실히 섭렵하려면 간편한 복장(특히 신발)에, 지도와 우산은 필참이다. 앉아서 쉴만한 곳도 많치 않고, 날씨 또한 변덕스러우니 말이다. 세계 55개국의 150 작가(통상적으론 100명 내외였음)가 내놓은 작품을 다 살펴보려면 최소 3,4일은 꼬박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도 올해 이 국제미술제에는 뉴욕MoMA(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파리 퐁피두센터 관장은 물론 내로라하는 미술계 유력인사들이 죄다 몰려들었다. 2010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이었다가 내년도 베니스비엔날레를 디렉팅할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 큐레이터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파리트리엔날레 총감독이자 독일 뮌헨 현대미술관 관장으로 부임한 미국인 큐레이터 오쿠이 엔위저도 모습을 드러냈다.

또 ‘아트 딜러계 전설’로 불리는 마리안 굿맨(뉴욕및 파리 마리안굿맨 갤러리 대표), 깊이있는 전시로 주목받는 샹탈 클루제(파리 샹탈클루제 화랑 대표)도 만날 수 있었다. 프랑스를 무대로 활동 중인 김승덕 큐레이터, 뉴욕MoMA의 회화및 조각부문 큐레이터 정도련도 카셀을 찾았다. 한국에서는 정형민 국립현대미술관장,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이용우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등이 프레 오프닝에 참여했다. 물론 한국작가로 20년 만에 카셀 도쿠멘타에 초대받아 작업한 양혜규(41), 문경원(43)&전준호(43) 작가도 공식 기자회견, 해외언론과의 연속 인터뷰 등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미술제, 비엔날레, 트리엔날레같은 낯익은 명칭 대신 카셀이 굳이 ‘도쿠멘타’라는 낯선 용어를 고집하고 있는 것도 유별나다. ‘미술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니스 비엔날레처럼 화려함을 과시하기 보다, 미래 현대미술을 진지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혁신적 방식으로 제안하기 위해 ‘기록(문서)’을 뜻하는 ‘documentation’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것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건물의 대부분이 파괴됐던 도시가 그 트라우마를 예술로 치유하며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지는 올 도쿠멘타 곳곳에서 잘 드러나 있다. 정치, 사회적 이슈를 엄정하게 담되 이를 치유와 성찰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작품들이 주요 장소에 배치돼 있었다. 고개가 절로 끄떡여지는 독보적이면서도 진중한 작업들이 여럿인 것.


전쟁 중 폭격을 맞은 카셀에서 수거한 종이책(거의 숯덩이처럼 타버린)과 아프칸 탈레반 정권이 ‘이슬람을 모독한다’며 파괴해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문이 일었던 카불의 바미안석불(5세기에 제작된 세계 최대 석불)의 잔해로 만든 책을 대비시킨 마이클 라코비츠의 설치작품 ‘What Dust Will Rise?’는 도구멘타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임신 5개월의 몸으로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스물여섯의 나이로 숨진 베를린 출신의 유태인 여성작가 샬롯 살로몬(Charlotte Salomon 1917-1943)이 생전에 남긴 과슈 연작 ‘인생? 또는 극장? 음악이 있는 연극’(Life? or Theatre?: A Song-play)도 서사적 이슈를 꾸준히 다루는 카셀 도쿠멘타의 성격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나치의 유태인 체포령을 피해 숨어지내던 샬롯 살로몬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1000여페이지에 달하는 일기와 그림을 남겼는데 이번 전시에는 그중 대표작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 일련의 연작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유태인박물관에서 빌려온 것들이다.

아름답고 웅장한 카를사우에 궁전 맞은 편에는 마치 경주의 고분처럼 봉긋 솟은 중국 작가 쑹동의 거대한 화분작업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정원’이 설치됐다. 작은 동산만한 크기의 이 정원은 난지도처럼 쓰레기로 만들어졌다. 쓰레기 더미에 흙을 덮고, 잡초와 나무를 심어 거대한 녹색정원을 조성했다.
 

도쿠멘타의 주전시장인 프리데리시아눔 미술관과 도큐멘타 할레에는 볼거리가 가장 많다. 전체 150명 작가 중 약 3분의 1이 이 곳에 작품을 설치했다.

검은 장막을 드리운 공간에 고단한 삶에 찌든 노부부를 표현한 부조회화 등을 내걸고, 수십개의 낡은 나팔로 엮어만든 드럼을 치며(실제 퍼포먼스도 하루 두차례 연다) 이들의 팍팍했던 생의 여정을 위무하는 미국 작가 린 폴크스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또 1960~70년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됐던 전위적 미술운동인 ‘아르테 포베라’(가난한 미술이란 뜻)의 작가 알리제히로 보에티(1940~1994)의 세계지도 작품 ‘Mappa’(1971년작)도 눈길을 끈다. 각국의 국기를 모티프로 그 영토를 정교하게 표현한 이 패치워크 작품은 아프카니스탄에서 제작됐다. 거대국가의 영토는 오대양 육대주를 뒤덮을만큼 그 나라 국기로 드넓게 물들이고 있으나 작은 나라는 국기 문양조차 찾기 힘들다.

반면에 미술관 초입의 너른 전시실을 완전히 비우고, 창문을 활짝 열어 눈부신 햇빛과 시원한 바깥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오게 한 라이언 잔더(Ryan Gander)의 작업은 가장 적은 표현으로, 가장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번 카셀 도쿠멘타는 당대의 작가들만이 참여한 것은 아니다.살바도르 달리(1904∼89), 만 레이(1890∼1976) 등 우리에게 낯익은 거장의 작품도 나왔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3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제작된 작고 우아한 돌조각 여인상도 프리데리시아눔에 전시돼 세계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담은 작품들이 타 미술제에 비해 현저히 강세를 보이는 것도 카셀 도쿠멘타의 특징이다. 아프카니스탄, 미얀마, 남아공, 크로아티아 등은 물론이고 모로코 접경지대 난민의 실상을 다룬 퍼포먼스와 성적 불평등과 신체장애, 신분격차 등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룬 작업들을 여럿 볼 수 있다.

도쿠멘타 홀의 메인전시장에는 독일 현대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 토마스 바이렐의 작업이 들어섰다. 초대형 비행기가 그려진 흑백의 대형 벽화를 내걸고, 버려진 기계 엔진을 방사상으로 조합한 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철구조물들을 만들어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분쟁을 은유했다. 도쿠멘타 홀에는 중국작가 얀 레이의 회화 설치작업 ‘한정된 예술 프로젝트’(Limited Art Project)도 화제다. 중국의 그림공장에서 가져온 명화 모사작, 이른바 짝퉁그림 360점을 내걸고 이를 하루에 3,4개씩 떼어내 폴크스바겐 자동차공장에서 도료로 덮어 다시 내건다는 프로젝트다.  앤디 워홀의 ‘마오’,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등을 그대로 베낀 짝퉁그림이 번쩍이는 자동차 도료로 덮힐 참인데, 도쿠멘타가 끝나는 100일 후에는 단 1점의 작품만 빼곤 모두 도료작품으로 변하게 된다는 컨셉이다. 


또 카셀의 시립 천문과학박물관에는 기술과 시간의 상관관계를 성찰한 영상작업이, 자연사박물관 내외부에는 허브(식물), 볍씨를 이용한 대형 설치작품들이 놓여 박물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카를사우에 정원을 지나 깊은 숲 속으로 한참 들어가면 마치 천상의 아리아같은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자넷 카르디프&조지 부르스 밀러의 음향설치작업을 만나게 된다. 십여대의 스피커를 둥글게 설치한 작품 중심에는 나무 등걸로 만든 의자들이 놓여져 그 곳에 편히 앉아 음악을 음미하면 된다.

숲 속에는 돈이 아니라 시간을 예금하게 하는 알록달록한 외관의 ‘타임뱅크’ 도 조성돼 관람객의 발길을 끈다. 이렇듯 현대미술은 이제 음악 무용 연극은 물론 공학,물리학, 천문학, 농업, 원예 등까지 가로지르며 미래 예술의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이번 카셀 도쿠멘타는 보여주고 있다. 이는 ‘카셀 도쿠멘타13’의 예술감독을 맡은 캐롤린 크리스토프-바카기예프(Carolyn Christov-Bakargiev)의 비전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프-바카기예프는 세계 각국의 기자 500여명이 운집한 기자회견에서 "이번 카셀 도쿠멘타는 전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도, 작가 선정의 기준도 없다. 동양과 서양, 장르와 시대를 뛰어넘어 예술·과학 그리고 세상을 한데 모으는 담론의 장이 되길 바란다. 여기서 함께 미래를 그리고, 성찰해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Neue갤러리와 화물역사에도 쟁쟁한 작가들의 작업이 여럿 설치됐다. Neue갤러리에서는 지금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췄지만 포토저널리즘의 대명사로 꼽혔던 미국의 ‘라이프’(LIFE)잡지 속 사진 수만컷을 일일이 가위로 오린 뒤 이를 빽빽이 설치한 제프리 파머의 작품 ‘풀밭의 잎새들’이 관람객의 발길을 붙들고 있다. 작가는 1935년부터 1985년까지 라이프 잡지 속 사진들을 파노라마처럼 정교하게 활용했는데 지난 50년간의 세계 역사가 섬세하기 이를데없이 펼쳐진 노작(勞作)이다. Neue갤러리에는 하산 칸(Hassan Khan)이라는 작가가 삼성 갤럭시S2로 촬영한 45분짜리 영상작업 ‘Blind Ambition’도 상영되고 있다.

버려진 카셀의 옛 화물역사에 설치된 작품 중에는 표준화된 시간 속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룬 윌리엄 켄트리지의 블랙홀같은 영상 설치작품이 가장 압권이다. 또한 나치의 어두컴컴한 벙커에서는 알로라&칼자딜 두 작가가 만든 영상작품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나무뿌리로 만든 엉성한 피리를 불며 어딘가로 애타게 신호를 보내는 듯한 여성의 모습은 폐쇄된 지하공간과 딱 맞아 떨어진다. 


이밖에 건물 옥상이며 호텔의 볼룸, 버려진 건물 등에 설치된 작품들과 요셉 보이스 등 옛 거장들이 도시 곳곳에 남겨 놓은 작품을 보는 묘미 또한 크다. 전세계 비엔날레와 미술제가 예산확보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도 무려 210억원의 예산을 투입한 이 매머드 실험미술제는 올해도 세계 곳곳에서 약70만명이 넘는 관람객을 모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기사및 사진 무단전재 금지>



카셀(독일)= 글, 사진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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