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작가 6인6색 성 테마 소설집…시대와 대상 초월한 소재로 솔직·다양한 성이야기 담아
개방적인 성, 상품화된 성이 범람하지만 소설 속에서 성은 여전히 충분하게 표현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소설의 주제, 소재로 낯설거나 두렵거나다. 우리 시대 여섯명의 여성작가들이 드러내 놓고 얘기하기 쑥쓰럽고 조금은 불편한 성에 도전했다. 20대에서 50대까지 개성적인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한유주, 이평재, 김이은, 구경미, 은미희, 김이설이 테마소설집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문학사상)를 펴내고 30일 서울 사직동 한 카페에 모여, 성을 테마로 소설쓰기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놨다.
이번 소설집은 문학사상이 지난해 8월 펴낸 남성편 ‘남의 속도 모르면서’에 이은 여성편. 당초 10명의 여성작가가 참여하기로 했으나 4명이 중도에 포기했다. 말하자면 여성작가들에게 섹스를 테마로 소설쓰기는 쉽지않은 과제였다.
이평재는 “성의 억압적이고 죄의식적인 면을 벗어나 새로운 색깔로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래 전 바타유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섹스를 작품으로 쓸 때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섹스는 본능이다, 본능은 자연이다, 자연은 자연스러워야하고 거짓 없고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억압적이고 죄의식 가질 필요 없다는 사유를 바탕에 갖고 썼습니다. 섹스를 서사로만 쓰려고 하면 포르노가 될 수 있는데 섹스를 통한 감성, 결 같은 것을 찾으려고 했어요.”
이평재의 작품 ‘크로이처 소나타’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와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배음(背音)으로 독신주의자이자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남자와 프리섹스주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여자의 성적 교감을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듯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6명의 여성작가들이 섹스를 테마로 소설집‘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를 내고, 30일 사직동의 한 카페에 모여 새로운 도전인 성을 주제로 한 글쓰기에 대해 털어놨다. 사진은 왼쪽부터 김이설, 은미희, 구경미, 김이은, 이평재, 한유주 작가.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
은미희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좋아하고, 언젠가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고 고백했다. 처음 출판사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는 의욕이 앞섰지만 이내 고민에 빠졌다고. 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출판사는 황홀한 첫 섹스의 기억을 요구하는데 저에게 첫 섹스의 기억이 황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스러웠어요. 고등학교 시절,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걸 고발적으로 써 볼까도 생각했다가 비겁하게 타협했어요. 아름다운 성, 추악한 성이란 무엇일까, 그 경계는 무엇일까를 생각했지요. 결론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아름다운 성이고. 자기만족적이면 추한 성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은미희의 작품 ‘통증’은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사진작가와 바닷속의 평화를 꿈꾸는 남자, 스무살 아래의 여자의 삼각관계를 담고 있다. 은 씨는 인간의 회귀본능을 근원적으론 자궁에 대한 회귀로 해석했다.
우리 사회 폭력성을 독하게 그려온 김이설은 “섹스 자체는 밥먹고 자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다. 섹스는 주제라기보다 소재에 가깝다”며 김이설 식의 느와르적 소설‘ ‘세트 플레이’를 선보였다. 현 시대에 있을 법한 고등학생들의 탈선 얘기다. 채팅으로 만난 아줌마와 모텔에서 섹스를 나누고 친구가 들이닥쳐 사진 찍고 때리고 겁줘 돈을 뜯어내는 일상이다. 욕설과 섹스장면을 B급 영화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비루한 성에 판타지는 없다.
김이은은 “섹스라는 주제로 소설을 쓰는 게 새롭고 재미있었다”며 쉽고 편하게 읽힐 수 있는 소설을 쓰려했다고 털어놨다. 섹스를 깊게 생각하지 않고 생활의 한 면으로 봤다는 것. “섹스를 에로티시즘이나 권력으로 접근하지 않고 진실한 삶 안에서 인간의 일상적 행위로 봤어요. 그래서 실제로 있었던 세종시대 얘기를 소재로 삼았고요.”
김이은의 작품 ‘어쩔거나’는 양반의 여식인 가이와 노비인 부금의 신분을 뛰어넘는 비극적 사랑 이야기. 질펀한 입담으로 풀어내는 지고지순한 비극적 사랑 얘기는 일상에 속하지만 이미 우리 것이 아닌 또 다른 성을 보여준다.
한유주의 ‘제목 따위는 생각나지 않아’는 주제를 벗어남으로써 주제를 환기시키는 한유주 식 글쓰기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여자의 집을 뛰쳐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동안 느꼈던 남자의 감정을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구경미의 ‘팔월의 눈’은 섹스가 관계의 도구로 전락한 씁쓸한 뒷맛이다. 공장에서 일하며 사법시험을 준비 중인 여자에게 어느날 한 남자가 다가온다. 식사와 술을 마시게 된 둘은 섹스를 나누지만 여자는 거기까지다. 그녀는 오직 검사가 되는 게 꿈이다. 지금 이뤄질 수 없어도 그만이다. 남자가 여자를 노동운동에 끌어들이려고 접근한 게 밝혀지고 여자는 공장에 흩날리는 회색빛 잿가루를 눈가루 같다고 생각한다. 구 씨는 “많은 섹스가 있지만 위로의 섹스 쪽에 비중을 뒀다”고 말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