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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란 선임기자의 art & 아트> 낯익으면서도 낯선…‘일상의 기억’을 꺼내다
美작가 로버트 테리안, 갤러리서미서 첫 한국전
238㎝로 쌓아올린 대형접시…그 옆엔 천장 높이 식탁다리

대상 극도로 확대·축소…단순함 속 숨은 이야기 가득

금방 비뿌릴 듯한 검은구름…3개의 구로 표현 참신 발상


이 접시들, 무척 낯익다. 어린이날이나 가족모임이 있는 날 찾곤 했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수프를 담아내는 접시들이다. 그런데 맙소사, 접시들이 초대형 사이즈로 뻥튀겨졌다. 지름 137cm로 커진 민트빛 수프접시 스무개를 켜켜이 쌓아올리니 높이 238cm의 탑이 됐다. 거대한 접시들은 엉성하게 포개져 옆을 지나기가 겁난다. 잘못 건드리면 와르르 쏟아질 기세다. 접시 옆에는 장중한 식탁의 모서리와 다리가 천장을 떠받들듯 위태롭다.

미국의 중견작가 로버트 테리안(65)의 설치작품은 관객에게 친근감과 낯섦을 동시에 선사한다. 테리안은 일상에서 늘 마주치는 것들을 크게 키우거나 작게 축소해 우리 앞에 펼쳐보인다. 그의 엉뚱한 실험은 우리를 아득한 초현실의 세계로 이끈다.

일상에서 늘 쓰는 평범한 접시를 거대하게 키워 탑을 쌓은 로버트 테리안의 설치작품 ‘무제(Stacked Plates)’. 일상용품을 엉뚱하게 재해석해 생경함을 던져준다.

미국 시카고 출신으로, 서부를 무대로 활약 중인 로버트 테리안의 작품전이 서울 가회동 갤러리서미에서 열리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선 명성이 꽤 높은 작가이지만 국내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테리안은 1980년대부터 단순하고 명료한 형태를 지닌 주전자, 관, 탁자 같은 일상 사물을 청동 브론즈 나무 등 다양한 소재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펼쳤다. 초기 그의 작업은 커다란 대상을 작게 만들고, 개인의 내밀한 부분을 담았다.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세 덩이의 구(球)로 축소해, 조각(무제,Black Cloud)으로 만든 게 그 예.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솜처럼 가벼운 구름을 꽤 묵직하고 딱딱하게, 그리고 검정색으로 변환시켰다는 점이다. 테리안의 ‘Black Cloud’는 형태는 부드럽지만 칠흙같은 검은 빛깔이 곧 비라도 뿌릴듯 의미심장하다. 심술궂은 구름과 관련된 작가의 추억이 연상된다. 가로 71cm의 구름조각은 책상에 놓을 수도, 벽에 걸 수도 있다. 벽에 걸린 딱딱한 검은 구름이라, 상상만 해도 그 엉뚱한 발상이 만화처럼 흥미롭다.

 1990년대 이후 테리안의 작업은 거대한 스케일로 변모했다. 작은 브러쉬를 거대하게 확장시킨 작품(무제,Scrubbrush)은 실제로 일상에 쓰이는 도구이지만 그 실용적 기능을 넘어, 어떤 마법적인 기운마저 느껴진다. 미국 중산층의 야외 피크닉용 탁자와 의자를 초대형으로 키운 ‘무제,Table leg’, 디너용 식탁을 확대한 작업도 마찬가지다. 

테리안의 조각 ‘무제(검은 구름)’. 솜처럼 가벼운 구름을 묵직한 구(球)로 표현했다.

테리안은 일상의 기물이나 대상을 축소, 또는 확대하면서 대상을 극도로 단순화시킨다. 이를테면 성당이며 교회의 경우 그 특징만 날렵하게 뽑아내, 삼각의 꼭지점이 하늘로 뾰족히 올라가는 형상으로 압축해내는 식이다. 그의 작업에 사용되는 오브제들은 작가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작업에는 사적인 이야기들이 내재돼 있다.

테리안의 작품은 가정에서, 또는 사무실에서 너무 자주 써서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며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의 스케일(Scale)에 대한 실험은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점을 제시하고, 사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커져서 앉을 수 없는 의자, 쓸 수 없는 탁자와 접시들 사이를 오가며 관람객들은 그 대상들의 ‘있는 그대로의 형태’와 그것이 주는 ‘물리적인 경험’에 집중하게 된다. 작가는 “각각의 사물들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기억과 추억을 품고 있다. 나는 내 작업을 통해 이들의 숨겨진 서술적 구조와 이야기를 드러내고 싶다”고 했다. 

테리안은 미국 LA현대미술관, 뉴욕 휘트니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뉴욕MoMA, 영국 테이트 모던, 프랑스 퐁피두센터 등 유수의 미술관과 개인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이번 한국 전시에는 대표작인 접시 설치작업과 다이닝테이블, 구름, 관, 교회 작업과 각종 조각, 오브제, 회화, 드로잉, 판화가 두루 출품됐다. 13일까지. 02)3675-8232

글=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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