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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통의 연애’, ‘땜빵’ 드라마의 위엄
#1.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일류는 아니더라도 내 몫의 꿈을 꿀 수 있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그 뒤에는 소소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직장을 갖는 삶. 그러다 나를 닮은 누군가를 만나 평범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때로는 다투기도 하겠지만 가끔은 동물원으로 소풍을 가고, 꽤 자주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사먹는 보통의 연애.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인연이라면 어느 먼 미래엔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도 싶었다. 나는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날 ‘살인자의 딸’이 되어버렸다. <윤혜>

#2. 죽은 큰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단 하나를 걸라면 아마도 엄마는 그 카드로 나를 선택할지 모른다. 엄마에게 나는 늘 부족한 아들이었다. 삼류대학조차 가지 못하는 아들, 한번에 사법고시를 붙는 형과는 비교될 수밖에 없는 딴따라. 그런 나 대신 어느날 형이 죽었다. 사고도 아니었다. 살해를 당했단다. 엄마는 지옥 속에서 7년을 살았다. 그 지옥의 불길은 언제나 내게로 향했다. 수백번 도망치고 싶었지만 아무리 달아나도 항상 제자리였다. <재광>


살인자의 딸과 그의 아버지가 살해했다는 남자의 동생이 만났다. 우연치고는 잔인한 만남, 그 시작은 어느 작은 관광안내소에서였다. 윤혜(유다인)는 지방의 관광안내소에서 계약직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마저 이제 마지막, 새로 부임한 소장은 윤혜에게 자리를 내놓으라 한다. 그 마지막 근무날 서울에서 사진작가라는 한 남자(재광ㆍ연우진)가 온다. 두 사람의 동행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드라마는 ‘살인용의자의 딸’과 ‘아버지가 죽인 형의 동생’이라는 남자의 만남을 토대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엄태웅 주연의 ‘적도의 남자’ 방영을 앞두고 소위 말해 ‘땜빵’으로 시작된 KBS2 연작시리즈 ‘보통의 연애(극본 이현주, 연출 김진원)’가 그려가는 스토리다.

4부작 드라마는 지난달 29일 첫방송된 이후 줄이은 호평으로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애국가 시청률로 불리는 고작 3%대의 시청률, 국민사극 반열에 오른 ‘해를 품은 달(MBC)’이라는 대형 콘텐츠에 ‘2014 브라질 월드컵 3차예선 한국 대 쿠웨이트’ 경기와 맞붙은 처참한 결과였으나 방영 이후의 반응은 여느 대작드라마보다 나았다.

드라마의 사연은 만들어진 콘텐츠 안에서나 가능할 법한 허구이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에는 우연이 없다.

사실 두 사람의 만남도 우연이 아니었다. 재광이 전주를 찾은 것은 형을 죽인 ‘살인자의 딸’ 윤혜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시작이 우연이 아니었으니 그 뒤의 과정도 우연일 것이 없다. 드라마는 그만큼 ‘개인의 존재’가 처한 삶을 ‘평범한 현실’이라는 기반 위에 분명히 부각시킨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우연의 역사’가 흔치 않다는 가정이다.

하지만 우연을 가장한 그 만남에 지나치리만치 단정한 윤혜는 잠시나마 무장해제되고 만다. 오로지 낯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살인자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룻밤마저 허락할 수 있겠다며 빗장을 풀어버린다. 여기에는 방송 이후 화제가 된 “나랑 잘래요?”라는 파격적인 대사가 단아한 유다인의 음성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그 남자, 아버지가 죽인 사람의 동생이라고 한다. 윤혜는 이 하늘 아래 도무지 자신을 숨길 곳을 찾지 못하는 절망에 또 한 번 주저앉는다.

드라마는 하필이면, 평행선 위에 놓여있는 두 사람을 굳이 끌어내 교차시킨다. 서로 다른 상처로 해를 등진 채 선 두 사람에게 어이없게도 같은 처방전을 내린다. 그 어이없는 ‘사랑의 과정’이 두 사람에겐 ‘기적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7년간의 고통이 모두 흩어져 없던 일이 되지는 않더라도 고통의 상처 위를 딛고 다시 보통사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소박하지만 무거운 소망을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그려가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묵직한 만남 뒤에는 드라마가 내세운 매력적인 요소들이 눈에 띈다. 그늘진 남녀의 얼굴 뒤로 햇살이 빽빽하게 들어찬 전주의 작은 마을들을 담아낸 영상과 조근조근 전해지는 지극히 담백한 대사들, 거기에 그 담백한 대사를 조금의 상처를 겪지도 않은 사람들처럼 아주 담담하게 처리하는 배우들의 호연이다.

두 남녀의 담백한 대화는 주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아버지가 살인용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어린 윤혜는 경찰서를 뛰쳐나가 어느 강에 몸을 던진다. 그것을 지켜보던 어린 재광은 모른 척 뒤돌아 갈 길을 간다. 재광은 7년 뒤 윤혜에게 묻는다. “그 때 안 무서웠어요?” 윤혜는 “코트가 젖어서 무거웠어요”라고 답한다. 그게 전부다. 상처와 고통은 참는 것이라 배운 이들이었기에 행복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숨겨야 한다고 익힌 두 사람이었기에 더이상 표현할 ‘무엇’이 이들에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어쨌든 살아내야 한다’는 지독한 현실에서 서로의 어깨를 빌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험난한 앞날이 예고되지만 드라마는 전제한다. 윤혜의 아버지는 ‘살인자’가 아닌 ‘살인용의자’로 7년째 지명수배중인 피의자라는 점. 평범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가장 ‘평범해야할 사랑담’을 섞어 미스터리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는 데에 결국 드라마의 반전이 있다.

이미 절반을 넘긴 ‘보통의 연애’는 ‘해를 품은 달’의 저격수 역할은 못했을지언정 현재까지 제 몫은 충분히 했다. ‘적도의 남자’를 위해 ‘해를 품은 달’을 대신 상대하면서도 예상을 깨는 호평으로 ‘해품달’ 못지 않은 탄성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1일 방송분 역시 3.1%(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전국시청률을 기록하며 얼마간의 아쉬움을 남겼다. 첫 방송분보다 0.4% 포인트 떨어진 수치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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