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서열 2위, 입법부 수장인 박희태 국회의장(74)이 24년 정치인생을 불명예로 막을 내리게됐다. 5월말 임기를 3개월 가량 남긴 채, 정치인으로서 치명적인 흠결을 안고 국회를 떠난다.
박 의장은 이승만, 이기붕, 박준규 등에 이어 국회의장 임기를 마치지 못한 역대 4번째 의장이 됐다. 특히 비리나 부패와 연루된 현직 의장이 불명예 퇴진한 것은 박 의장이 처음이다.
검사장 출신인 박 의장은 1988년 13대 국회 당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국회에 첫 입성했다. 당시 입에 발린 말 대신 “그냥 나가라고 해서 나왔다”는 출마의 변을 남기는 등 솔직한 직설화법으로 화제를 모았다.
정치입문과 함께 그는 대변인을 맡았다. 민정당 대변인을 맡은 뒤,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면서 생긴 민주자유당의 대변인을 이어받아 4년 3개월을 지냈다.
정계에서는 아직도 그를 ‘전설의 대변인’으로 부른다. 그는 또 박희태 어록이라 불릴 정도로 귀에 꽂히는 말을 만들어내는데 능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냐”는 말도 그가 남긴 어록 중 일부다. 1996년 총선 이후 여당과 균형있는 의석을 확보한 야당이 여당을 몰아세우자 직설적인 언사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정치9단’도 그의 입을 통해 나왔다. 1989년 12월 5공 청산 문제를 풀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야3당총재가 청와대에서 만났을 때,“대통령과 세 분 총재는 모두 ‘정치 9단’의 입신(入神)의 경지에 있다”고 표현했다.
당 대변인을 하다 문민정부 들어와서 법무부장관에 발탁됐다. 하지만 당시 딸의 대학 특례입학 논란으로 취임 10일만에 물러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원내총무, 한나라당 부총재, 최고위원 등 주요 당직을 두루 섭렵했다. 지난 2007년 대선 때는 이명박 후보 측 ‘6인 회의’ 멤버로 MB정권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입법부 수장이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10년만에 국회으장 물망에 올랐으나 18대 총선 공천을 못받았다. 그러다 2008년 7월 당시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통해 집권여당 당 대표에 오르며 재기에 성공했다. 2009년 10월 재보선에서는 맹추격하던 송인배 민주당 후보와의 경쟁에서 가까스로 이기고 국회에 입성했다.
우여곡절끝에 18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을 맡았으나, 임기 말미에 같은 당 고승덕 의원이 폭로한 돈봉투 사건의 당사자로 지목받으며 정치인으로서의 도덕성에 큰 흠결이 드러났다. 상황이 악화되자 지난달 19대 총선불출마를 선언했지만, 돈봉투 사건으로 실추된 명예회복은 역부족이었다.
결국 박 의장은 9일 한종태 국회대변인을 통해 “저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며 의장직을 그만두고자 한다”며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겠다”며 사퇴의 변을 밝혔다.
한편, 박 의장은 경남 남해 출신으로, 경남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법무부 국장, 검사장,고등검사장을 지냈으며, 13~18대까지 지낸 6선 정치인으로, 당 대변인, 법무부장관, 당대표 등을 두루 지냈다.
조민선 기자/bonjod@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