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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완서,육성으로 듣는 못다한 이야기 “나는 지금 꿈을 꿔도 노는 마당은 고향마을이야”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역에 내리고 싶다. 나 홀로 고개를 넘고 넓은 벌을 쉬엄쉬엄 걷다가 운수 좋으면 지나가는 달구지라도 얻어타고 싶다.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때는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


2011년 1월22일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 씨가 말년에 쓴 ‘내 식의 귀향’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전쟁과 피란, 좌우갈등의 무지막지한 세월, 자식과 남편의 죽음이 가져다 준 생의 아픔이 만들어 낸 허무와 작가는 늘 꿈꿔 온 고향에 안김으로써 화해하고자 했다.

박완서 추모 1주기를 맞아 책 출간이 줄을 잇고 있는가운데 ‘예술인ㆍ生’(수류산방)에는 작가가 그동안 글을 통해 못다한 얘기들이 육성으로 고스란히 담겼다.국립예술자료원이 펴내는 구술총서의 하나로 작가는 2008년 다섯 차례에 걸쳐 구술을 진행됐다. 책은 2월 중순 출간된다.


책에 담길 구술 내용을 보면, 박완서는 늘 그랬듯, 고향 개성 얘기를 꺼낼 때엔 그리움과 자긍이 넘치고 목소리가 꿋꿋했다.

“저는 지금 꿈을 꿔도 꼭, 어른이 됐는데도 내가 노는 마당은 그 쪽”이라며, 작가 특유의 수줍은 웃음을 짓는다.

구리시 아차울로 이사한 것도 “우리 고향마을 같다”는 것이었다.

“우리 고향마을도 밤나무숲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저기가 지금 밤나무숲이거든요. …그러고 저기 시냇물이 저 멀리 있고, 지금 저 쪽으로 한강이 보이잖아요?”

서울와서 공부할 때엔 어서 방학이 돼 시골가서 어릴 적 동무를 만나는 생각만 했다.

해방공간 개성의 모습에 대해서도 작가는 상세히 구술했다.

“개성이라는 지역이 묘했어요. 삼팔선을 긋는데 선을 긋는다는 게 쉬운게 아니지요.아마 개성으로 선이 지나갔던 것 같애. 맨 처음에는 삼팔 이남이었다고 그랬나 아무튼 미군이 들어왔어요. 그러다가 조금 있다가 소련군이 들어왔었다가 아, 이건 잘못됐다 그래서 미군이 들어오고.…이런 일이 있고는 아주 삼팔 이북이 됐지요.아주 혼란스러웠던 시긴데 그래도 우리가 해방되고 나니까 그럴 적에 막,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거는, ‘우리는 태극기를 만들어야 된다’. 일장기는 집집마다 있죠. 그것 가지고 태극기를 만드는 게 쉬워요. 누구네 집에 먹이 있잖아요. 지금 태극기는 위에는 파랗지만 맨처음 우리는 빨강을 남기고 검은 걸로 다 그리고 사괘도 엉터리로 그렸어요. 그렇게들 하는데, 개성 시내에 어떤 집에서 태극기를 내걸었는 데, 아주 공단 천에다가 박음질을 다 이렇게 한 거에요.…어우 저 집은 정말 품위있어 보이고 그걸 간직하고 있었구나”

작가의 숙명여고 시절, 당시 종로서관이 대형서점으론 처음 생겼다. 반 친구네 집에서 경영한 종로서관은 그에게 꿈의 장소였다. 작가는 친구한테 책을 자주 빌려봤다. 입시 무렵엔, 대학입시문제집 하나를 빌려 며칠 새우고 본 뒤 돌려줬다고(다시 팔 수 있도록).

그때 유행했던 책들은 아쿠타가와 책,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제인에어’,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등이었다. 고 3 때는 이상의 산문 ‘권태’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6ㆍ25 전쟁과 피란시절, 못 떠난 서울에서의 처참한 생활을 증언함으로써 증언문학의 입지를 세운 작가는 서울대에 입학하던 해 6ㆍ25가 터지고도 7월 달까지 학교에 나가 겪은 일들을 들려준다.

“인민군이 서울에 있을 동안, 그러다 제가 민청운동이라든가, 학교에서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고 학교를 안 나가게 된 것이 8월입니다.”

작가는 나가지 않은 이유를 가장 인간적인 소망인 가족이 오순도순 사는 그런 재미를 뺏아간 데 있다고 했다. “제가 가장 그 쪽 생활이 힘들었던 건 우리는 참 가정생활이란 걸 중요시하잖아요. 근데 가족이 모여서 밥 한끼 먹을 수가 없이 무슨 단체에 다 속해야 해요.”

결혼과 함께 예단 때문에 남편과 시어머니와 싸운 얘기는 슬며시 웃음마저 나온다. “옛날 조그만 집이니까 시어머니가 혹시 들을까 봐. 일본말로 안따노 오카상이 당신 어머니란 소리예요. 안따노 오카상 이러고 저러고 맨날 바가지를 긁는 거에요. 그러면 절대로 대답을 안해요 우리 남편은. 그러고 조금 있다 보면 코를 골아요. 그럼 내가 너무 속상해서 꼬집어. 꼬집어서 깨고. 깨고. 어느 날은 회살 나가는데 보니까 여기 푸릇푸릇하게 멍이 들었어. 어, 이게 뭐야? 당신이 밤에 꼬집은 거 아냐. 그래서 내가 그럼 긴 거 입고 나가라고. 괜찮아, 누가 당신이 꼬집었다고 생각하겠어.(웃음)”

아이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작가는 어머니를 닮았다. 어떻게든 한글은 가르쳐 보낼라고 집에 가, 갸, 거, 겨 써서 붙여놓고, 6학년 때는 엄마들이 선생님한테 잘 가르쳐 달라고 돈 걷어서 드리고 그럴 때 거두는 일도 하고 모임에도 가면서 성의는 다했다고 했다.

잡지 여원에 ‘나목’ 이 당선됐던 당시 얘기도 생생하다. 습작 한 번 없이 일기책에 잘게 메모해 써 둔 걸 원고지에 옳겨쓰는 식으로 1200장을 완성했다는 것. 당선된 뒤 문예지에서 청탁이 올까봐 두려워 일년간 단편 다섯 편을 쓴 일화도 들려준다. 그것이 이를 테면 습작기였던 셈.

당선 이듬해 처음 원고청탁을 한 이는 월간문학 편집을 맡고 있던 소설가 이문구. “저희 집 주소를 몰랐는지 저희 딸이 경기여고 2학년이었어요. 저가 당선됐을 때 2학년인데 그것이 와전이 돼서 내가 경기여고 선생이다. 그렇게 들었나 봐요. 그래갖고 경기여고에다 원고청탁서를 보내신 거에요. 그것도 우리애…엄마가 당선된 거를 알은 국어선생님이 우리 딸한테 줘 가지고 걔가 갖고 왔어요.”

경제적인 상승욕구가 가장 강했던 70년대, 중산층의 전형으로 화제가 된 신문연재소설 ‘휘청거리는 오후’에 대한 얘기는 팍팍한 오늘의 현실을 읽는 데도 통한다.

“우리가 앞으로 막 달려가잖아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그때 우리가 그 전에 믿은 인간성이랄까 그런 거 우리가 유기해 버린 뭐가 있을 거에요. 중요한 가치랄 것이.…중소기업인으로서의 어떤 누가 알아주는 건 아니지만 신의라는 게 있잖아요. 그 신의를 바탕으로 장사를 하던 사람이 그걸 잃은 거에요. 사기를 친 거에요. 그 끝을 자살로 끝맺는 걸로 나와요.”

작가는 훗날 후기에 아마 그 기업인이 양심과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는 마지막이 될 거라고 썼다. “그만큼 그때는 돈을 위해서 사기친 게 덜 뻔뻔했던 시대지만 그 후에는 더 많이 벌어지지만 누가 고런 걸로 목숨 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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