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3월, 영화배우 최은희씨(85)는 헤어졌던 남편 고(故) 신상옥 감독을 납북 5년만에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선으로 열린 평양의 연회에서 재회했다. 최은희는 “김정일은 흥겨운 분위기에서 기분이 좋았는지 술을 꽤 많이 마셨다”며 “취기가 돌아 불그스름한 얼굴로 신 감독의 손을 자기 무릎 위로 끌어당기며 꼭 쥐었고, 신 감독은 그 순간 김정일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풀렸노라고 말했다”고도 덧붙였다. 최씨는 당시 만난 30대의 김정일에 대해 “남한에서 말하는 것처럼 망나니 후계자가 아니었다, 카리스마가 넘쳤고 현실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눈과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라며 “나에게 온갖 배려와 친절을 베풀었지만 원망의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많은 이들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회고록 ‘최은희의 고백’에서 당시 7살이었던 김정일의 장남 정남을 소개받은 일화도 공개했다. 납북 한달여만에 최씨는 생일을 맞은 김정일의 집에 초대됐다. 이 자리에 갑자기 포동포동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뛰어들어왔는데, 김정일이 “우리 집 아이입네다”라고 소개했다. 최씨가 이름을 물었더니 아이는 “와 남의 이름을 다 물어?”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고, 김정일이 “정남아, 어른이 물으면 ‘예, 저는 누굽니다’. 이렇게 답하는 거야”라고 일렀다고 한다.
김정일은 생전 대단한 영화광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을 처음으로 외부 세계에 알린 이는 신상옥 감독이었다. 유고집 ‘난, 영화였다’와 ‘영화감독 신상옥, 그의 사진풍경 그리고 발언 1926-2006’ 등에서 신 감독은 “개인 소유나 마찬가지인 김정일의 영화문헌고에는 1만 5000여편에 달하는 세계 각국의 영화 필름이 보관돼 있다”며 이중 번역, 녹음된 것이 절반 가량 되니, “하루 한 편씩 감상해도 20년이 넘게 걸린 분량”이라며 감탄을 마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 영화는 김일성 및 그 가계의 우상화와 사회주의적 선전, 선동의 정치적 도구로 영화를 이용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신 감독의 생전 회고에 따르면 김정일은 “한국 배우들은 먹고 살기 위해 경쟁을 하면서 연기를 열심히 닦고 있는데, 이쪽에는 생활이 보장돼 있기 때문에 그런 긴장감이 부족하다” “소련 갔다온 동무들이 광폭영화 촬영법도 모른다” “우리(북한)는 지금 울타리 안에서 자기 것만 보고 남의 것과 대비할 줄 모르는 바보들, 그래서 다른 제도하에서 사는 사람을 한번 데려다가(납치) 실지 예술을 해보자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북한에서 신 감독과 최씨가 신필름을 설립하도록 했으며 연건평 2만평의 아시아 최대 규모 촬영시설을 만들어줄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부부는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는 밀사’ ‘사랑 사랑, 내 사랑’ ‘철길을 따라 천만리’ ‘불가사리 등을 제작했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