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여의도 小孟子 강창희,한국의 월스트리트에서 존경받는 까닭은…
한국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라 불리는 동(東)여의도. 야망과 탐욕의 담벼락이 인간성을 가둔 곳이다. 1956년 증권 시장 개장 이래 떼돈을 번 사람도, 패가망신을 한 인생도 모두 부지기수다. 성공의 절대잣대는 철저히 숫자화된 ‘수익률’. ‘인간성’을 찾기란 구우일모(九牛一毛)에 가깝다. 그래도 ‘일모(一毛)’의 확률을 뚫고 척박한 여의도에서 인간적인 ‘존경’을 받는 이가 있다. 바로 강창희(64)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이다. 40대에도 까딱하면 퇴물 취급받는 증권가에서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은퇴 전도사’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의 에너지원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맹자(孟子)의 말처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의 끝자락(仁之端)이라면 그는 여의도의 ‘소맹자(小孟子)’라 할 만하다.

▶더 나은 내일이 있기에…고생은 행복이었다=정말 농사를 짓고 싶어 서울대 농경제학과에 입학한 청년 강창희. 하지만 그의 첫 직장은 한국거래소였다. 여느 대학졸업반처럼 졸업 즈음이 돼 일자리를 구하던 중에 응모를 해 합격했다. 1973년 10월이었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젊은이와 같다.


그런데 우연히 맞춰진 증권과의 궁합은 찰떡이었다. 남덕우 당시 재무장관이 자본시장 육성 정책을 펼 때라 신입직원임에도 불구하고 굵직한 제도마련 업무를 맡았다. 덕분에 신입사원임에도 해외연수 기회를 잡게 된다. ‘해외’라고 하면 미국을 떠올리던 시기였지만, 신입사원 강창희의 선택은 일본이었다. 강 소장은 ‘영어는 못했기 때문’이라 애둘러 말했지만, 당시 우리 제도의 근간이 일본에서 온 만큼, 제도관련 업무를 하던 그에게 일본은 학습, 즉 전문용어로 ‘벤치마크(benchmark)’ 대상이었다.

단기 연수였던 만큼 연수 자체가 그의 인생을 달라지게 한 건 없었다. 그런데 연수기간 맺은 인간적 인연은 그의 인생을 달라지게 한다. 인연을 맺은 이와의 교류를 위해 일본어 공부가 필요했고, 한국외대에서 6개월간 일본어를 배우며 그 끈은 더욱 튼실해졌다. 인연의 끈은 그가 1977년 대우증권으로 회사를 옮기는 데까지 미친다. 대우증권에서 해외조사업무를 맡기겠다는 제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관심은 일본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여의도의 겨울로 다가왔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다보니 해외조사업무도 별 필요가 없게 됐다. 앉아서 노느니, 공부나 더 하자며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물론 회사 지원은 없었지만, 지인의 소개로 고베대학 석사과정에 어렵지 않게 입학하게 됐다. 그런데 33세 가장의 ‘무책임한(?) 결정’에는 책임이 따랐다. 서울대 출신의 대한민국 엘리트지만 빠듯한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이또햄이란 공장으로 달려가 리어카를 끌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당시 20대였던 부인이 한국 불고기집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해서야 근근이 생계를 꾸렸다.

▶나면서부터 전문가는 없다=1984년 점차 회사 사정이 나아지고, 5공 정부의 대외개방 정책까지 겹치며 강 소장의 인생에도 다시 볕이 든다. 대우증권에서 서른여덟의 나이에 업계 최초로 도쿄사무소장 자리를 맡긴 것이다. 햄공장 리어카를 끌지 않아도, 젊은 새댁이 불판을 닦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일본 공부는 이때부터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당시만해도 모든 분야에서 한국보다 앞섰던 일본이기에, 일본의 새로운 트렌드는 한국에는 최신 정보였다. 일본 증권사 월보 내용을 번역해 한국의 잡지나 신문에 싣기만해도 화제가 됐다. 요즘 말로 발로 뛰는 ‘정보 검색’이랄까. 일본 내 인맥이 두터워지고, 소개하는 글의 내용에도 내공이 쌓이면서 한국에서의 정보 요청도 쇄도한다. 그래도 공부하고 글만 썼다면 좀 편했을 텐데, 그가 맡은 대우증권 도쿄사무소장이 간단한 자리가 아니었다. 당시만해도 국제선이 드물던 탓에 관료나 기업인들이 해외로 갈 때는 도쿄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곤했다. 해외주재원의 ‘사역’인 의전이다.

원고 요청은 밀려들었지만, 의전으로 새벽 2시까지 술자리를 하는 날이 주 6일이었다. 늘 마감을 앞두고 코피 터지게 밤을 새웠다. 일본 전문가이자, 마감 전문가까지 된 셈이다. 전문가 강창희가 완성된 것은 그의 마감 후 습관에서 확인된다.

“마감날 새벽 5시까지 원고를 딱 써놓고 그 다음에 냉장고 문을 열어요. 위스키를 꺼내 맥주잔에 반 채우고 얼음 넣고 물을 좀 넣으면 그걸 ‘미즈와리(みずわり)’라고 하는데 한 잔 쭉 들이키면 속이 자르르르 하죠. 여기다 담배 한 대 삼키면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만감이 들어요. 내 인생에 그렇게 맛있는 술은 없을 겁니다.”

일본에서 8년 3개월을 보내고 자녀들 교육 문제로 귀국을 결심했다. 1989년 2월 본사에 국제영업부장으로 복귀한다. 그런데 일본 겸 마감전문가 강창희를 맞이한 건 뛰어난 유학파 후배들이었다. 유상호 현 한국투자증권 사장, 이남우 현 토러스증권 영업총괄대표 등이 당시 부하직원이었다.

그래도 당시 일본 증시가 잘 나갈 때라 국내에서는 “일본을 배우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1989년 말 한창 때 일본의 시가총액은 미국 시총의 1.5배에 달하기도 했다. 관료건 타 증권사 직원이건 일본 관련 궁금한 것들은 모두 그에게 질문했다. 심지어 일본의 증권사 객장 카운터는 몇센티미터인가라는 시시콜콜한 질문까지 들어왔다. 뛰어난 후배들이 즐비했지만, 강 소장은 샛별을 삼키는 태양이었다.

1990년대 초반 일본 경제가 추락한다. ‘지일파(知日派)’도 퇴색한다. 하지만 강 소장은 주저앉지 않았다. “이번에는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자”고 외쳤다.

“그때 일본이 미국으로 해외 시찰단을 보냈어요. 일본에서 사귄 지인들이 시찰단 보고서를 나에게 보내줬어요. 일본 문제는 이렇고, 미국에 가보니 이렇더라는 내용이었죠. 거기에 한국은 이렇다를 보태 그때부터 한ㆍ미ㆍ일 비교자료를 많이 냈죠.”

▶펀드와 인연을 맺다=1990년대 일본 증시의 가장 큰 문제는 자산운용업이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자산운용사가 재벌 계열사나 대형은행 자회사가 많다보니 낙하산 인사가 사장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증시 대들보가 돼야 할 펀드들이 엉망이었다. 투자철학도 잘 통하지 않았고, 단기성과주의와 보신주의만 팽배했다. 반면 미국은 1980년대 초부터 퇴직연금 등이 활성화되면서 펀드가 시장의 주축이 됐다.

이제 중년이 된 일본통 강창희는 ‘일본 자산운용사의 문제점=우리나라 자산운용사의 문제점’, ‘피델리티는 어떻게 해서 성공했나’ 등을 신문사 기고 등을 통해 전했다. 펀드가 생소했던 터라 그의 글을 눈여겨 본 당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1998년 그를 현대투신운용 사장으로 스카우트했다. 1999년 4월 ‘바이코리아펀드’를 출시했다. 외환위기로 폭락했던 주가가 꿈틀거리면서 바이코리아펀드 열풍이 불었다.

“이익치 회장이 말을 시작하면 아줌마들이 뿅가요. ‘신흥종교 교주가 이런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죠.” 바이코리아펀드는 출시 3개월 만에 12조원까지 자금이 몰렸지만, 대우그룹 부도와 IT 버블 붕괴로 한여름밤의 꿈이 된다. 첫 최고경영자(CEO) 시절 천국과 지옥을 모두 경험한다.

이때 그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지체장애인 딸과 함께 살면서 그간 모은 1500만원을 러시아펀드에 넣은 파출부 아주머니의 사연이었다. 당시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면서 러시아 국채가 폭락하자 회사는 투자자들에게 원금의 20%를 물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 아주머니는 원금을 전부 돌려주지 않으면 회사 앞에서 분신자살을 하겠다고 했다.

“투자자 보호라는 것이 뭔가, 리스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게 상품을 판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미국에서는 노약자나 무학자에게 위험 상품을 팔면 대부분 소송에 걸리고 지잖아요.”

2000년 바이코리아로 무너진 현대투신을 떠나 강 소장은 굿모닝투자신탁운용에서 두 번째 CEO 이력을 시작했다. 불나방처럼 수익률만 좇았던 바이코리아펀드의 경험은 그에게 투자자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굿모닝투자교육연구소를 세우고 직접 연구소장을 맡는다.

▶박현주와의 만남, 강사 강창희 인생 이모작의 시작=굿모닝운용 대표 임기가 끝날 무렵 독립해서 투자교육연구소를 차릴까 고민하던 강창희 사장은 당시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에게 투자교육연구소 설립을 제안했다. 사실 박 회장과는 현대투신운용 사장시절 부하직원이던 장인환 팀장(현재 KTB운용 사장) 소개로 두 차례 정도 만나 식사를 한 것밖에 별다른 친분도 없었다. 박 회장 대답은 의의로 단번에 OK였다. 당시만 해도 크지 않던 미래에셋이었지만 창업 초기부터 사회공헌과투자자교육을 통한 기업가 정신을 경영철학으로 내세웠던 박 회장이 통 큰 결단을 내린 셈이다. 박 회장은 그에게 ‘부회장’이란 직함과 함께 투자자교육을 위한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돈을 모아야 돈을 버는 자산운용업이지만, 강 소장에게는 영업의 ‘영’자도 꺼내지 않았다. 박 회장이 사내에서 가장 많이 들르는 곳도 투자교육연구소다.

2004년부터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 겸 퇴직연금연구소장을 지내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투자교육 전문가’, ‘은퇴준비 전도사’ 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2004년 삼성경제연구소 주최로 CEO를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오래 사는 위험’에 대해 강의하자 끝나고 여기저기서 전화가 빗발쳤다. 당시로서는 그만큼 생소하고도 충격적인 주제였다.

▶강창희, 인생설계 조언자가 되다=강 소장은 전국을 누비는 인기강사다. 총 강의 횟수는 3000회를 바라보고 있다.

강의에서 그는 연령대에 맞는 자산관리, 포트폴리오 구성 등을 역설한다. 삶에서 얻은 경험도 풍부한 강의 자료다. 과거에는 “주식 올라요, 떨어져요? 뭘 사야 해요?” 이런 데만 관심을 보였던 투자자들도 이제 자산 설계, 노후 설계에 진지하다.

강 소장은 무엇보다 재테크 설계가 아니라 인생 설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재산 불리기에 급급하지 말고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데 매진하라고 충고한다. 가장 큰 투자엔진은 바로 자신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체면 역시 버려야 행복한 노후를 맞을 수 있다고 강 소장은 강조한다.

“설문조사 결과 노후가 불안하다는 사람이 60%인데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대로 고민을 합니다. 웬만한 정부부처 국장이나 CEO 하다 은퇴한 분들 보면 ‘1년에 몇 번 해외 나가고 주말엔 골프도 쳐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러다보니 불안해지는 겁니다. 그건 미국에서 귀족이나 재벌들의 삶인데 말이죠.”

강 소장은 지금도 지방 강연을 갈 때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자가용을 타고 가면 책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심 약속이 없으면 회사 지하 식당에 내려가 혼자 먹는다. 인간은 타인의 눈길에서 지옥을 경험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걸 벗어나면 천국이라는 게 그의 생활지론이다.

“반만 버려도 행복합니다. 품위 있는 노인이 되려면 정말 노력해야 합니다. 이미 늙은 뒤에는 늦고 50대부터 그런 의식을 갖고 준비해야 합니다.”

100살까지 사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끔찍하다고 말한다. 서양의 한 프라이빗뱅커(PB)가 고객에게 “당신이 90살 넘어 100살까지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준비된 노후는 보람 있고 행복할 수 있다며 측은지심으로 그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이 바로 강창희 소장이다.

홍길용ㆍ신수정 기자/ssj@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