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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이란 사회문제 정교하게 녹여낸 수작
씨민과 나데르는 치매 걸린 아버지와 여중생 딸을 부양하고 있는 이란 중산층의 중년 부부다.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감독 아스가르 파스허디)는 이들 부부가 선 이혼 법정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부부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부인 씨민은 어린 딸을 위해 이민을 가고자 한다. 남편 나데르는 아내의 말을 따를 수 없다. 거동이 불편하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 때문이다. 딸의 양육권 문제로 이혼마저 어렵게 되자 결국 부인 씨민은 별거를 선택한다. 아내가 집을 나가자 나데르는 당장 치매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것이 큰 문제다. 그는 간병인을 고용한다. 어린 딸을 데리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여인 라지에다. 그녀는 차도르로 온 몸을 감싼 독실하고 순박한 무슬림이다.

그런데 어느 하루, 직장에서 일찍 돌아온 나데르는 치매 걸린 아버지가 팔목이 묶인 채 의식을 잃고 침대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화가 난 나데르는 외출했다가 돌아온 라지에를 해고한다. ‘나가라’는 나데르와 ‘못나간다, 급료를 줘라’며 항의하는 라지에. 서로간의 실랑이 끝에 라지에는 복도에서 넘어져 유산을 하게 되고, 나데르는 4개월이 넘은 태아를 죽인 ‘살인죄’로 기소된다. 판사앞에서 나데르는 “간병인의 임신 사실도 몰랐고, 밀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라지에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양측의 진실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데르의 여중생 딸과 그의 가정교사가 증인으로 나서게 되고, 라지에 측에선 직장에서 억울하게 해고당했다는 실업자 신세의 남편이 강경하게 나데르 측을 압박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한 중산층 부부의 이혼 소송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건의 이면에 이란 사회가 가진 다양한 층위의 이슈들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배치해낸 수작이다. 생동하는 캐릭터와 에피소드로 법과 제도, 계급과 빈부격차, 종교와 정치, 전통과 현대화 등의 문제를 논쟁적으로 제기하는 영화다. 지난 2월 열린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이 영화에 이례적으로 최고상인 황금곰상과 은곰상인 최고 남녀배우상 등 3개의 트로피를 몰아주며 그 성취를 기렸다. 최고 남녀배우상마저도 한두 명이 아니라 ‘앙상블’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의 주요 출연진에게 모두 주어졌다.

이 영화가 지닌 지적 성찰의 힘과 정서적 호소력은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윤리적 딜레마에 처해 있다는 사실과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상황에서 빚어진다. 씨민은 어린 딸의 미래와 시아버지에 대한 연민ㆍ애정 사이에서 결국 이민과 이혼을 결정한다. 나데르는 어린 딸의 양육과 남편으로서의 도리, 병든 아버지에 대한 책무 사이에서 아들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실랑이 끝에 피해자와 살인혐의자로 법정에 서게 된 라지에와 나데르는 양심의 목소리와 가정을 더이상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절박함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실과 거짓을 오간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삶까지 지켜내야 하는 그들 각각의 싸움은 힘겹고 외롭다. 특히 독실한 무슬림인 라지에는 엄격한 교리와 척박한 현실 사이에서 고통을 받는다. 이 싸움은 때로 ‘진실’을 알고 있는 소녀인 나데르의 딸이나 그를 가르치는 성실한 교사까지도 끌어들여 가족이나 지인을 고발하지 않으면 거짓을 말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으로 몰고간다. 씨민과 나데르, 라지에를 비롯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누가 봐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며, 이제까지 합리적이고 양심적으로 살아온 시민들이라는 점은 영화의 긴장감과 리얼리티를 배가시킨다.

현란한 액션이나 자극적인 사건이 없이도 영화가 얼마나 강렬한 드라마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치밀하고 흥미진진한 영화다. 지난 13일 개봉했다. 12세 관람가.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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