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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영훈의 이슈프리즘> 금배지도 울고, 기자도 울었다...국회를 찾은 도가니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꾼다.” 온 나라가 청각 장애인 학교 성추행 사건을 그린 영화 ‘도가니’에 빠지면서 제도개선의 목소리가 높다. 영화가 나와서야 비로소 세상이 바뀌려는 것이다.

1989년 한국계 미국감독인 크리스틴 최의 다큐멘타리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Who killed Vincent Chin?)’도 미국내 이민자 차별 문화와 제도를 개선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세상을 바꾼 영화로 꼽힌다.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이 결혼을 앞둔 독신의 마지막밤 파티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한 백인에게 항의하다 맞아죽었지만 백인법정은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내용이다. 솜방망이 판결이라는 점에서 ‘도가니’와 유사하다. 영화가 개봉하면서 재심 여론이 들끓고 차별의식 근절운동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몇 전 년 선보인 마이클 무어의 ‘식코’도 미국 의료보험체계의 부당함을 알려 오바마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국민 의료보험 가입을 골자로 하는 의료보험 개혁안을 내놓도록 했고, 에롤스미스 감독의 ‘가늘고 푸른 선’은 살인사건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해 영화개봉후 재수사를 통해 피고인을 뒤바꿔 놓는 변화를 일으켰다.

‘도가니’의 가해자들을 더욱 엄정하게 다스릴 길은 바늘구멍이 됐지만,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았다. 하지만 말만 무성할 뿐 ‘약속된 것’은 아무것도 없던 터였다.


‘도가니’가 12일 저녁 국회를 찾았다. 이날 마침 도가니대책위의 입법 청원이 있었고, 여야 의원 80여명이 국정조사 요구서를 냈지만, 변화의 강한 징후는 ‘도가니’가 서울 여의도동 1번지 국회의원회관 강당에 들어와서야 실감나게 다가왔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진수희 한나라당 의원이 주관하고 CJ E&M이 후원한 이날 국회 시사회에는 한나라당 이혜훈, 나성린, 민주당 박병석 의원 내외, 이용섭, 오제세, 김성곤, 강기정의원, 미래 희망연대 윤상일, 김정의원 등 바쁜 일정에 영화를 보지 못한 의원과 보좌진, 국회환경미화원, 복지시설 종사자등이 모였다.

영화에 앞서 도가니대책을 위해 활동하던 한 장애인지도자는 “지금도 강원도 한 학교에서 성추행과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다”면서 “2007년 사회복지법인에 공익이사제를 시행하자는 방안에 대해 우리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종교단체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한나라당이 수용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그는 “분노로만 그칠 게 아니라 희망의 도가니가 됐으면 좋겠다. 아울러 국민 여러분의 희망도 됐으면 좋겠다”고 말해 좌중을 숙연하게 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끔찍한 성폭행 장면, 아이를 세탁기에 넣고 학대하는 장면에서 국회의원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박병석, 오세제 의원은 “우리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우리한테 용서를 빌지도 않았는데 왜?”라고 수화로 가해자 석방을 항변하는 민수의 모습을 보고 끝내 눈물을 훔쳤다. 이혜훈 한나라당 사무부총장의 흐느끼는 소리는 몇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들렸다. 순박한 성품의 자원봉사자, 미화용역원들은 ‘불편한 진실’앞에 “나쁜 놈”이라며 치를 떨었다. 솜방망이 처벌의 원인으로 묘사된 전관예우에 대한 비난도 육두문자로 표출됐다. 객석 오른쪽 뒤편 취재기자들도 울었다.

영화가 끝난뒤 눈물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이혜훈 의원은 “일반적인 사학과 사회복지재단을 분리해 처리했어야 했다”며 이번 회기 ‘도가니’ 법안 처리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박병석, 이용섭 의원도 “반드시 통과”를 약속했다.

국회에 인연을 맺어본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은 개별적으로 만나면 인간적이고 인품도 높은데 집단적으로 묶어놓으면 왜 인간 이하의 행동을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은다. 이날 도가니와 함께 한 국회의원들은 인간이었다. 불의에 분노하고 함께 울어주는 이웃이었다. 집단으로 움직일 때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인데 대한 그들의 자성도 느껴졌다. 진 의원도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도가니는 제도 개선은 물론 우리의 정치문화까지 바꿀지도 모르겠다.

<함영훈 선임기자 @hamcho3>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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