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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로 본 PK
4·19 촉발 3·15 마산시위

독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



노무현 정권 탄생부터

김두관 도지사 당선까지

정치변혁의 싹 틔웠던 곳







1960년 자유당의 3ㆍ15 부정선거 당시 경남 마산시민들은 선거포기를 선언하고 시위를 준비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1960년 4ㆍ19혁명의 첫 단추를 마산시민들이 꿴 것이다. 3ㆍ15 마산시위는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길이 남을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79년 10월 15일 부산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면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시작됐다. 이어 마산과 창원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도 PK(부산ㆍ경남). 시위는 진압됐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의 최후를 재촉하는 도화선이 됐다.

PK는 독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한 야도(野都)였다.

이런 PK를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빼고 논할 수 없을 터. 야성(野性)의 중심에는 YS가 늘 자리하고 있다.

1979년 신군부의 12ㆍ12 사태 이후 YS는 정치일선에서 쫓겨났다. 그래도 PK의 야성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1985년 2ㆍ12 총선에서 신민당은 위성정당인 민한당 등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신민당은 서울 부산 인천 대전 광주 등 대도시에서 후보 전원이 당선됐다. 1984년 12월 신민당 창당대회에서 YS는 연금을 당해 참석할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5공 세력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활동 피규제자에 대해 전면 해금조치를 취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지역에 기반한 4개 정당이 출현했다. PK지역에 기반한 민주당은 부산 15개 지역구 중 14개 지역에서 당선자를 냈지만, 경남에서는 민정당(12곳)과 민주당(9곳)이 나눠 가졌다.

1992년 집권에 성공한 YS는 PK의 여도화(與都化)를 시도했다. 당시 YS 측근의 “부산 시민들이 그동안 야당 많이 뽑아주는 바람에 예산도 못 받고 지역발전도 지체됐으니 이제 의리를 지키셔야 한다”고 말한 데 대해 YS는 지역숙원사업 해결에 적극 나섰다고 한다.

수영비행장 이전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유치, 해양수산부의 깜짝 탄생 등은 YS의 PK 달래기였다.

DJ정권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몰표를 몰아주면서 제1당 자리를 안겨준 PK는, 2002년 ‘노무현’의 등장부터 최근까지 진정한 야도로 돌아서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대선 당시 전통적 한나라당 강세 지역인 PK에서 득표율 28%를 기록했고, 2004년 총선에선 호남 기반의 민주당 후보인 조경태 의원이 부산에 처음으로 깃발을 꽂았다.

노무현의 탄생으로 동서대결 구도에 조금씩 금이 가는 가운데 PK의 반한나라당 정서는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6ㆍ2 지방선거에서 ‘리틀 노무현’ 김두관 무소속 후보가 경남도지사에 당선되는가 하면 김정길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도 44.6%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조동석 기자/dsch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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