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분실 몇만원 빌려달라”
내일 준다더니 감감 무소식
포털서 검색해보니 유령인
“호의 악용” 피해자들 씁쓸
쌍둥이 엄마인 주부 A 씨는 지난 23일 황당한 일을 당했다.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서울 안암동 고려대 인근 찜질방에 가는 길이었던 A 씨는 야구복을 입은 50대 남성과 마주쳤다. 이 남성은 다짜고짜 “나는 삼성 라이온즈 김진홍 코치다. 혹시 나 모르냐”면서 말을 걸었다. A 씨가 모르겠다고 하자 이 남성은 “알아볼 줄 알았는데 속상하다”며 “고려대 후배들과 술 한잔 하고 집에 가려다 보니 차에 휴대폰과 지갑을 두고 내렸다. 내일 경기도 있고 해서 목동에 가야하는데 혹시 택시비 1만6000원을 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A 씨가 망설이자 이 남성은 수차례 자신이 공인임을 강조하며 “공인이 거짓말을 하겠나. 세상 참 야박해졌다. 의심이 되면 스마트폰으로 내 이름 검색해 봐라”며 되레 화를 냈다. A씨는 자신도 지갑을 분실해 난감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라 측은한 마음에 남성에게 택시비 2만원을 빌려줬다. 돈을 건네고 연락처를 요구하는 A 씨에게 남성은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내일 1시까지 폰뱅킹으로 돈을 보내주겠다”며 A 씨의 휴대폰 번호와 계좌번호를 적어갔다.
하지만 사기였다. 집에 돌아온 A 씨는 남성의 이름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 봤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코치는 국내 프로야구단 어디에도 없었다. 다음 날이 돼도 돈은 입금되지 않았다. A 씨는 “검색을 해보기 전까진 되레 그 사람을 의심했던 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결국 사기였다. 돈이 아깝다기보단 나의 선행을 악용한 점이 화가 난다”고 말했다.
프로야구 인기에 힘입어 최근 유명 프로야구단 코치를 사칭하며 행인에게 1만~2만원 등치는 소액 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최근 서울 안암동 일대에서는 자신을 김진홍 코치라고 소개하며 택시비를 빌려 달아나는 사건이 잇따라 두 건 발생했다. 안암동 뿐만 아니다. 피해자들의 제보에 따르면 ‘김진홍 코치’에게 택시비 명목으로 돈을 주고 돌려받지 못한 경우는 여의도, 강남, 성수동 등 서울 지역과 대전,대구 등 지방에서도 올해 초부터 최근까지 왕왕 발생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몇가지 공통점이 나온다. 우선 50대로 추정되는 이 남성은 ▷흰색과 파란색이 섞여있는 야구복을 입고 한손에는 야구 가방을 들고 있으며 다른 한 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있다. 일부 피해자에게는 “새로 산 노트북을 맡기고 차비를 빌리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자신이 공인임을 재차 강조하며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보라”라는 대담함을 보이며 ▷“세상 사람들이 너무 야박해졌다”며 상대방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방법으로 접근한다 ▷지방에서는 지역에 따라 구단의 이름을 달리하기도 하며 ▷주로 야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여성들을 공략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성수동에서 같은 피해를 당한 B(여) 씨는 “그 남자가 건네준 연락처로 다음 날 전화를 했더니 수신금지 상태였다. 욱하는 마음에 경찰서에 전화도 해봤지만 ‘사기 피해를 당한 것 같다’는 대답만 들었다. 1만~2만원이라 액땜한 셈치고 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생각할 수록 화가 난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재 프로야구 구단 내에 김진홍이라는 이름의 코치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삼성라이온즈 측은 “우리 구단에는 김진홍이라는 이름의 선수나 코치가 없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한국야구위원회(KBO)도 “현재 프로야구 구단에 김진홍 코치는 없다. 협회쪽으로 피해 사실이 접수된 바도 아직은 없다”고 밝혔다.
이진형 KBO 홍보팀장은 “과거에 유명 야구선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사기를 치는 사건이 꽤 있었다. 프로야구가 다시 대중적인 인기를 끄니 그 인기를 등에 업고 이러한 범죄도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까지 피해 신고가 접수된 것은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면 조사를 통해 추가 피해를 막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sjp10@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