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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책>중국 강남에서 환대받은 19세기초 조선 선비
“관에서 하루를 머물 때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어서 바다에 표류하였던 상황을 두루 적었다.‘승사록’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장건(張蹇)이 황하의 근원을 찾는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월중(越中)의 사대부들이 날마다 찾아와 초록해가는 사람이 있었다.”

조선의 선비 최두찬은 1817년 4월 제주 대정현의 현감이 된 장인의 요청으로 그해 5월 제주도로 가 1년 동안 두루 보고 1818년 4월 일행 50명과 함께 귀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가 큰 풍랑을 만나 16일 동안 표류한다. 그가 수저 한 숟가락의 물로 버티며 죽을 고비 끝에 표착한 곳은 중국의 강남 영파. 5월 2일 정해현에 도착한 그는 별 할 일이 없자 ‘승사록’이란 제목으로 표류체험을 적어 내려갔다. 이를 보고 강남의 문인들이 방문해 승사록을 베껴가며 돌려봤다는 얘기다.

‘승사록’(휴머니스트 펴냄)은 표류체험과 함께 강남의 풍부한 물산과 화려한 의복, 건축물, 내왕한 사람들과의 필담 등이 세세히 기록돼 당시로서도 새로운 정보로서 의 가치가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강남은 조선선비들에겐 공식적인 봉명사행이 끊기면서 상상의 공간, 동경의 대상이었다.

최두찬은 정해현을 “작은 지방이나 금, 은, 비단의 풍부함은 남쪽에서 으뜸이었다. 높은 누대와 큰 누각이 곳곳마다 보이나, 묘죽으로 만든 집은 한 채도 있지 않았다. 비단이 아니면 입지 않았고, 물고기나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승사록’은 풍물에 대한 흥미있는 정보를 넘어 명이 청으로 교체되며 오랑캐에게 망한 중국을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대중국 인식의 일면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 일단이 최두찬 일행이 5월 2일 정해현에 도착한 뒤 5월 3일 주패란이란 사람이 찾아와 나눈 대화에서 드러난다.

방문자는 대뜸 주자의 후손인가를 묻고, 그는 명태조 주원장의 후손이라 답을 한다. 일행 중 한 사람인 김이진이 매우 공격적으로 주원장의 후손이면서 망국에 대한 감회가 없느냐고 질문하자 주패란은 불쾌감을 표한다. 오랑캐에게 나라를 빼앗긴 중국 지식인에 대한 조소와 실망을 드러낸 셈이다.

위송관인 양월이 최두찬을 ‘난이(難夷)’라 칭한 데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비슷하다. 오랑캐에게 망한 망국의 신민이 최두찬 자신에게 오랑캐라 지칭한 데 모욕감을 느끼며 명나라가 망함으로써 소중화인 조선이 동아시아 문화질서의 중심에 있다는 말로 최두찬은 자존감을 드러낸다. 한편으론 명나라가 붕괴된 지 오래된 19세기 초반임에도 오랑캐의 나라, 청조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여전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최두찬을 대하는 중국인들의 태도다.

거의 매일 여러 명의 중국인이 방문해 필담을 나누게 된다. 지적 호기심을 한자라는 공통된 문자를 통해 서로 교류한 것이다. 최두찬에 대한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무리지어 찾기도 하고 선비들이 줄지어 방문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태도는 융숭하고 공손함을 잃지 않는다. 장서가들은 책을 빌려주고 물품을 주거나 개인적인 선물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최두찬이 여러 현에 걸쳐 중국 지식인들과 시를 주고받은 양도 놀랍다.

남중(南中)의 사대부들이 날마다 들락거려 시장(詩章)과 필담으로 번갈아 주고받았으며 응수에 힘이 부칠 지경이었다고 쓰고 있다.

한번은 여사(女史) 대여섯 사람이 승사록이란 작품을 한번 보여달라며 규방의 비루함을 깨게 해달라고 청원해왔다.

“내가 여자들이 글을 아는 것을 가상히 여겨 그 전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읽고 네 사람은 담배를 빨면서 둘러앉아 들었다. 입을 모아 글 읽는 소리가 들을 만하였다. 내가 이에 절구 한 수를 지었다”고 했다.

최두찬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조선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지리, 풍속, 역사 등 초보적 질문에 최두찬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조선이 오랑캐의 땅이 아니라 교화된 군자의 땅”이라며 점잖게 이른다.

19세기 초 지식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표류 내용 중 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풍랑에 떠밀리던 중 최두찬은 글을 지어 해왕과 선왕의 신에게 고한다. “신령한 신이 각기 직책대로 도움을 주셔서 우리를 큰 육지로 인도해 주소서”라는 글을 올리곤, “이런 말이 이치에 맞지 않아 망령됨을 알지만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이렇게 글을 지어 올린다는 부연설명이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표류기는 1488년 최부가 지은 ‘표해록(漂海錄)’으로 표류 관련 연구는 이 책이 전부다. 이번에 번역된 승사록은 표류기 중에서는 가장 최근 것으로 표류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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