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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 공분을 말하다-4] ‘민감한 드라마’ 안 만드나, 못 만드나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기득권의 부조리를 겨냥하고,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 비상식이 상식이 된 사회를 반영하는 민감한 주제를 다룬 현대극은 흔치 않다. TV 속 대중문화는 시대를 반영하기에 한국사회가 걸어온 변화과정과 흐름을 같이 한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정통사극이 아닌 현대극에선 현실정치를 환기하는 드라마는 ‘모래시계’ 이후 흔치 않았다.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움직임이 안착됐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도입 이후 양극화가 고착되고 박탈감이 커지는 시점이 되니 문제제기를 하는 드라마가 서서히 등장했다”고 흐름을 읽었다. 


갑을 논란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세월호 참사로 인한 국민의 상실감이 커지며 지난 한 해 브라운관은 우리 사회의 비상식을 겨냥한 드라마를 서서히 내보내기 시작했다. 언론과 자본, 정치권력의 부조리를 다뤘고, 공권력을 화두에 올렸다. SBS ‘피노키오’, ‘펀치’, KBS2 ‘힐러’, ‘빅맨’, ‘어셈블리’, MBC ‘개과천선’이 있었다.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로맨틱코미디나 정통멜로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다.

드라마 시장이 ‘소재의 한계’에 갇힌 데엔 두 가지 이유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들은 말할 수 없는 사회분위기와 방송사의 상업적 논리를 꼽는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그것이 알고 싶다’(SBS)처럼 우리 사회의 공분을 건드리는 소재는 다뤄주기만 한다면 시청자들의 반응이 따라올 수 있지만 방송사마저 눈치를 봐야하는 구조 안에선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하재근 평론가는 특히 “정치권을 비판하는 드라마는 시청자의 관심과는 별개로도 정치권력의 과도한 공격을 받을 소지가 크다”고 봤다.


노사문제 역시 금기시되긴 마찬가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송곳’에 출연 중인 배우 안내상은 “2003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2015년까지 이어지고 있는 노동계의 화두를 다룬 드라마”라며 “원작 웹툰을 봤을 당시 이 드라마가 방송으로 가능한가 의문을 품었다”고 말했다.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을 이야기하며 잡혀가던 시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나 ‘민감하고 불편하다’ 싶은 소재의 드라마는 지금이라고 쉽지는 않다. 방송사가 선뜻 나서지 않으니, 제작자들은 기획을 피한다. 드라마가 나와도 출연 배우들은 출연을 고민한다. 출연한다 해도 드라마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기는 꺼린다. 지난해 권력의 부조리를 겨냥하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에 출연했던 두 명의 주연배우는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현실의 폐부를 찌르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호평받았으나 인터뷰에선 “작가가 써주는 대로만 했다”, “그런 건 잘 모른다”며 말을 아꼈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정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 한 마디에 공격받기 쉬우니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게 낫다. 모든 말을 다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데다, 연예인이기 때문에 힘든 부분이 더 많다”고 말했다.

방송사의 상업적 논리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그간 드라마 시장의 주류 콘텐츠는 멜로나 코믹물이었다. 시청자는 피곤한 일상을 잊을 수 있는 콘텐츠를 즐기길 원했고, 이는 일종의 흥행공식이 됐다.

날카롭게 폐부를 찌르는 드라마가 나온다 할지라도 시청률은 변변치 않았다. “내가 겪는 불편한 일상을 왜 TV에서까지 봐야하냐”는 대중의 정서를 제작자들은 확인했다. 결국 흥행력이 약한 콘텐츠는 광고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재원확보에 목 마른 방송사의 입장에선 ‘돈 되는’ 콘텐츠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상업적 논리는 특정 콘텐츠를 제작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콘텐츠일지라도 성과가 나온다면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너무 문제가 없는, 이 콘텐츠로 인해 정권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만 않는다면” 이라는 단서는 붙는다.

드라마 ‘송곳’과 시사고발 ‘그것이 알고 싶다’가 상업방송인 JTBC와 SBS에서 방영 중이라는 사실은 때문에 흥미롭게 다가온다. 각 방송사가 처한 환경이 의외의 전략을 만들어낸다. “경제적 이윤을 획득하는 데에 목적을 둔 상업방송, 즉 오너가 있는 방송사는 기본적으로 어느 한 쪽 편에 서지 않기에 공영방송보다 상대적인 자유로움”(최진봉 성공회대 교수)이 있다.

SBS의 월화드라마 시간대는 올초 ‘펀치’를 시작으로 ‘풍문으로 들었소’, ‘미세스캅’에 이어 ‘육룡이 나르샤’까지 편성했다. “월화 10시대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 수목 10시대는 로맨스 위주의 드라마를 편성”(한정환 SBS 데)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가져간 ‘전략’을 세웠다.

이 시간대 드라마는 ‘펀치’가 14%대의 시청률을 낸 것을 시작으로 흥행력을 확인했다. 시대의 목소리를 내는 콘텐츠의 편성은 해당 방송사에 대한 대중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역할도 한다. 시사 프로그램 사상 전무후무한 팬덤을 형성한 ‘그것이 알고 싶다’의 영향력이 SBS라는 방송사에 미친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송곳’ 역시 기획 단계부터 JTBC에서 방영된다는 이유만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국내 굴지 대기업과 사돈관계에 놓인 보수언론에서 파생된 종합편성채널이라는 태생,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는 방송사에서 우리 사회의 평범한 인권 현장을 다룬 드라마를 방송한다는 이유에서다.

김석윤 JTBC PD는 “어떤 콘텐츠이든 결국 방송이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만드는 주체는 중요하지 않다”며 “연출자의 입장에서 콘텐츠는 돈을 벌 수 있느냐는 상품가치보다는 시청자에게 던질 수 있는 의미를 먼저 판단하게 된다. 평가는 방송이 끝난 이후에 받겠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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