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사도세자와의 비극적 인연이 부각된 나머지 다른 면은 덮어진 측면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탕평책이다. 노론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영조이지만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곤 이를 없애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우선 한 일이 당파성이 강한 인물들을 쫒아내고 양 쪽에서 고루 인물을 자리에 앉힌 일이다. 그럼에도 노론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영조는 소론을 적극 등용하는 정책을 펼친다. 영조의 방향은 흔들림이 없었다. 당파를 넘어 인재의 고른 등용이었다. 이에 비범한 영조는 자신의 뜻을 신하들에게 관철시키는 통로로 경연을 활용했다. 성종 때에 법으로 만들어진 경연은 아침, 점심, 저녁 3강(三講)을 기본으로 수시로 이뤄지는 소대, 밤에 실시하는 야대 등 독서와 토론의 자리가 수시로 마련됐다. 다른 국왕에 비해 늦게 독서를 시작한 영조는 경연을 통해 모자람을 채워갔다. 신하를 압도할 정도였다. 31세에 즉위해 83세까지 영조 즉위 52년 동안 펼친 경연횟수는 모두 3458회. 1년에 평균 66회, 1달 5회 꼴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때에도 3강의 법강은 그만두었지만 강경(講經)이라는 이름으로 이어갔다. 이 때는 임금이 책의 본문을 읽고 유신들이 풀이를 읽게 했다. 유신들이 가르쳐 주는데서 함께 공부하는 형태로 바꾼 것이다. 신하들은 달갑지 않았다. 경연의 본래 목적은 신하들의 ‘성군 만들기 프로젝트’인데, 거꾸로 왕이 신하들을 가르치는 자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신하들은 입을 벙긋할 수 없었다. 독서로 성리학의 사상과 이념, 통치원리를 완전히 깨친 영조를 당해내지 못했다. 탕평책도 이 자리를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영조의 리더십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터 위에 정조는 조선의 화려한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된다.
이윤미 기자/mee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