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개 기관ㆍ개인 소장 76점 출품…보물 포함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도성 곳곳에 복사꽃이 피었다. 햇볕이 따스한 어느 봄 날 임이 분명하다. 새로 부임한 평안감사는 배를 타고 평양에 입성한다. 70여척의 행렬단이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케 한다. 평안감사를 보기위해 기녀들과 사대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감사가 탄 정자선안, 장막안 탁자위에 놓여진 2개의 인궤가 당당하다. 북성, 내성, 중성, 외성과 중앙 시가지가 자세히 담긴 병풍에는 조선시대 평양의 모습이 담겼다. 19세기 화원화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기성도8폭병풍’이다. 비록 2018년의 평양과 직접 비교할 순 없지만 옛부터 무척이나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였으리란 짐작이 가능하다.
기성도8폭병풍 [사진제공=아모레퍼시픽미술관] |
조선시대 제작된 다양한 병풍이 한 자리에 모인 기획전 ‘조선, 병풍의나라’가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관장 전승찬)에서 12월 23일까지 열린다. 궁중과 민간에서 제작하고 사용한 병풍의 가치와 조형적 멋까지 살필 수 있는 기회다. 전승찬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관장은 “4~5미터의 장대한 화면이 펼쳐지는 병풍은 조선을 대표하는 전통회화지만 오히려 병풍 자체를 조명한 전시나 연구는 드물었다”며 “조선시대 작품을 비롯, 전통을 잇는 근대 작품까지 모아 전통문화의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살펴보기 위해 기획됐다”고 설명했다.
전시엔 국내 10여기 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병풍 76점이 나왔다. 보물 제 733-2호 ‘헌종가례진하도8폭병풍’, 보물 제 1199호 ‘홍백매도8폭병풍’,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70호 ‘전이한철필 어해도10폭병풍’,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76호 ‘기성도8폭병풍’,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92호 ‘요지연도8폭병풍’ 등이 포함돼 그 수준이 상당히 높다.
고종임인진연도8폭병풍 [사진제공=아모레퍼시픽미술관] |
관람자들은 병풍의 전체적인 미감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작품 가까이 서서 꼼꼼하게 살펴보길 권한다. 디테일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는 재미가 상당하다. 1902년 11월 덕수궁에서 열린 고종의 망육순(51세)과 즉위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를 그린 ‘고종임인지연도8폭병풍’에선 서양식 제복을 입고 도열한 신식군대와 태극기가 보인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국이 된 당시의 시대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검기무를 추는 여인들도 있다. 민간에서 유행하다 궁중 연향에 편입된 것으로, 1795년 혜공궁홍씨 회갑잔치 그림 이후 꾸준히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구운몽, 춘향전, 삼국지연의의 주요 장면이 담긴 병풍도 있다. 당시 유행했던 소설이나 이야기를 곁에 두고 봤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단에 채색이나 한지에 채색이 아닌 자수 병풍, 철필이나 인두를 달궈 종이 표면을 지져 그림을 그리는 ‘낙화(烙畵)’기법 병풍도 눈길을 끈다. 궁중에서 연회나 행사를 기록하고 남기기 위한 병풍외에도 화조도, 책가도, 묵죽도, 풍경을 비롯 민화까지 그림 소재도 다양하다.
고종임인진연도8폭병풍 부분. 서양식 제복을 입고 도열한 군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이한빛 기자/vicky@] |
흥미로운건 이같은 병풍이 생활에서 늘 쓰였다는 점이다. 좁고 낮은 전통가옥의 방에서 원경을 끌어들이는 역할도 했으며, 집을 꾸미는 인테리어로도 쓰였다. 뿐만이랴, 결혼ㆍ환갑ㆍ제사 등 각종 행사에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병풍은 배경으로 등장한다. 궁중여인들의 단체 사진에도, 덕혜옹주의 돌사진에도, 제복을 입은 고종과 순종의 뒤엔 병풍이 자리잡았다. 진정, 조선은 병풍의 나라다.
/vicky@heraldcorp.com
금니노안도6폭병풍 [사진=아모레퍼시픽미술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