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공과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그럴만도하다. 그의 정치역정은 한마디로 부침과 영욕의 연속이었다. 5ㆍ16 군사정변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JP는 이후 43년간 공적 활동을 이어갔다. 그 동안 9선의 국회의원과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냈다.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4개 정당의 총재를 역임했다. 박정희-김영삼-김대중 정부를 차례로 출범시킨 킹 메이커로 ‘영원한 2인자’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오랜 주역’인 그를 빼고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 과정에서 적도 동지도 수없이 생겼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극명하게 엇갈리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JP에 대한 상반된 평가의 관점은 민주화와 지역주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그는 우리 사회의 영원한 갈등요인인 ‘민주화 대 근대화’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부정적 평가의 핵심은 군부 독재에 부역해 한국의 민주화를 후퇴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도 있다. 군사정변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였다. 그게 80년 1645달로, 2000년에는 그토록 고대하던 1만 달러를 넘어섰다. 산업화가 성공한 덕이다. JP는 박정희 정권을 도와 60~80년대의 산업화를 성공시킨 주역이다.
이 때 형성된 중산층이 한국 정치 민주주의의 근간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그는 피보다 ‘빵’이 먼저라는 지론을 펼쳤다. 자유와 민주주의도 먹고 살만 해야 가능한 얘기라는 것이다.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지역주의를 고착화시킨 장본인이란 혹평도 만만치 않았다.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을 규합해 영남의 YS, 호남의 DJ와 함께 3김 시대를 구가했으며, 90년 3당 합당으로 호남을 고립화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이 역시 공산주의 소련의 붕괴와 냉전 해체기에 정치적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공존한다.
김 전 총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전적으로 후대의 몫이다. 다만 그의 타계를 계기로 새겨 담아야 할 것은 합리와 실용, 그리고 여유와 품위의 정치다.
지금의 정치권은 각자의 진영논리에 집착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너무 부족하다. 그의 말처럼 정치는 허업(虛業)일 뿐이다. 그의 영정은 환하게 웃으며 조문객을 맞고 있다. 하지만 오직 국리민복(國利民福)만 생각하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매진하라는 후배 정치인들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이 소리없이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