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아 장필수 기자의 인스파이어]
정신적 외상은 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즐거움과 친밀감을 느끼는 능력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면역 체계에도 자국을 남기죠. 한 달 전 미투 고백을 했던 피해자 A 씨는 지난 20일 제게 다시 말을 전해왔습니다.
“저는 여전히 아픕니다.”
성폭력 피해 기억은 짙습니다. 그리고 몸은 상처를 기억합니다. 신의진 연세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성폭행 피해 기억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성폭력 생존자인 서도이 화가는 "길었던 고통의 시간을 끝내고,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성폭력 생존자로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첫 개인전 '죽은 민영이의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서민영에서 서도이로 이름을 바꿨다. |
#. 몸은 기억한다
신 교수는 과거 고통스러웠던 성폭력 피해 기억이 되살아난 뇌에서 몇 가지 특성이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뇌의 기록기라고 할 수 있는 배외측 전전두엽 피질 우측과 좌측의 활성이 사라지면서 피해자는 시간 감각을 잃게 됩니다. 어떤 순간에 갇힌 채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해마에 장기 보존된 공포나 불안, 분노 같은 감정 기억이 되살아나고 절대 이겨 낼 수 없을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 동반되는데요. 특히 성폭력 경험은 피해자의 자존감을 뒤흔드는 기억이기 때문에 뇌의 편도체에 장기적인 부정적 기억으로 남아 평생 긴장과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고 신 교수는 강조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과거 사건을 다시 떠올릴 때 우측 뇌가 지나치게 활성화 되다가, 이후 뇌의 모든 부분에서 활성이 크게 감소하는 해리 상태를 반복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뿐 뇌는 이미 상처를 입은 것이죠.“
지난 6여년간 성폭력 피해 청소년들을 만난 상담 전문가 B 씨(41)도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 감정’을 표출하던 피해자가 갑자기 마비된 듯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어요. 머릿속이 텅 비고 뇌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활성이 현격히 감소한 해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죠. 그때 어떤 기분인지 물으면 피해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폭행을 당했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신 교수는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고 말했다. |
그래서 미투 운동을 바라보는 우리가 놓쳐선 안되는 점이 있다고 신 교수는 꼬집습니다.
“수사 전문가와 의료 전문가가 피해자의 몸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진술해야 정확한 기억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곁가지 기억이 변한다고 해서 전체의 기억이 거짓은 아닙니다. 핵심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어요.”
#. 성폭력 피해자 자살 시도 4배↑ 의료비는 43%↑
실제로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성폭력 경험이 없는 사람에 비해 다양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1980~2000년 시행된 성폭력과 정신질환 관련성을 분석한 37개의 연구 결과*를 계량적으로 종합한 해외 연구를 보면 성폭력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성폭력 경험이 없는 사람에 비해 불안장애(3.09배), 우울장애(2.66배), 식이장애(2.72배),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2.34배), 수면장애(17.17배), 자살 시도(4.14배) 진단 위험이 높습니다.
특히 민감도 테스트에서 강간을 당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우울증이 6.27배 높고, 식이장애는 21.69배나 높았습니다. 성범죄 피해자가 감당해야만 했던 아픔과 고통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죠.
과거 트라우마와 마주한 후 나타난 공백 반응. 뇌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활성이 감소해 사고, 집중, 방향 감각에 혼선이 발생했다. [책 <몸은 기억한다>] |
이뿐만 아닙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일반 환자보다 병원 진료를 더 자주 받아 의료비 지출이 컸습니다. 구체적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간호 비용은 일반 환자들과 비교하면 10%에서 40%까지 더 듭니다. 전체 의료 비용을 따져도 13%에서 43% 정도 높고요.
신 교수는 덧붙였습니다.
“피해자들이 발고 이후에 너무 힘이 드니까, 고통만이 오롯이 내 것이라고 말을 해요. 다른 기억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데 밤마다 찾아오는 고통만은 내 것이라고. 이 한 마디가 피해자의 아픔을 잘 드러내는 말인 것이죠.”
상처는 흔적을 남깁니다. 그리고 몸은, 상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 피해자를 중심으로 분석된 논문을 찾고자 했으나 발견할 수 없어 해외 연구(2010, Sexual Abuse and Lifetime Diagnosis of Psychiatric Disorders: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를 소개했습니다. 김재원 서울대병원 해바라기센터 소장은 “우리나라 성폭력 관련 학술자료 가운데 피해자를 체계적으로 추적 관찰한 논문은 단 1건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신들의 미투, 우리들의 위투] 기획 시리즈
① 뇌는 상처를 기억한다
② “커서 상담사 됐죠. 그때의 날 닮은 아이들 안아주고 싶어서”
③ ‘우리’가 ‘그들’의 미투를 다시 읽다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