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갤러리, 6월 18일까지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예전엔 마을 어귀마다 이런 나무가 있었다. ‘서낭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주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나 마을로 들어가는 큰 길가에 자리잡았다. 마을을 지켜주는 신이 ‘서낭신’인데 그 신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역할 외에도 가족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만남과 이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가족의 복을 비는 장소이자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낭신이 사는 거목(巨木)을 ‘신목(神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는 전남 완도출신의 서양화가 손장섭(75)의 개인전을 연다. ‘역사, 그 물질적 흔적으로서의 회화’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손장섭의 1960년대 작품부터 신작까지 회화 38점을 선보인다. 그의 개인전이 서울에서 열리는건 5년만이다. 손장섭 화백은 이른바 ‘민중미술’작가로 분류된다. 그는 1980년대 민중미술을 태동시킨 ‘현실과 발언’의 창립 동인이자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손장섭(76)화백의 눈에 비친 신목은 좀 남달랐다. 1000년 혹은 2000년이 넘은 거목들은 그에게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인간보다 오랜시간 살아온 나무가 인간이 자행한 역사의 또다른 증인으로 보였다. 손 화백은 “나무는 삶이고 역사입니다. 한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봤을 테니까요”라며 “자연은 현실에서 유리된 대상이 아니고, 민중의 삶이 펼쳐지는 터전이자 역사가 배어있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손화백은 신목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남양주 용문사 은행나무, 태백산 주목, 속리산 정이품송, 영월 은행나무를 비롯 우리나라에서 오래됐다는 수령 2000년의 울릉도 향나무를 화폭에 담았다. 캔버스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부드러운 파스텔톤이다. 그러나 여성스럽다기보단 남성미가 느껴진다. 오랜시간을 버텨온 나무의 생명력이 힘있고 강한 붓놀림으로 표현됐다. 나무를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하얀 그림자는 나무의 아우라이자 기운이다. 짧은 생을 살면서도 서로를 끌어안기보다 오해하고 미워했을 수많은인간상을 바라본 나무의 아우라는 슬픔도 안타까움도 담고있지 않았다. 초월적 존재의 위엄이 느껴진다.
전시에는 근작인 나무그림 외에도 한국 근현대사를 담은 작품도 나왔다. 작가가 고등학교 3학년시절 겪은 4ㆍ19혁명의 시위대 풍경을 그린 수채화 ‘사월의 함성’,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한 ‘우리가 보고 의식한 것들’을 비롯 ‘천막촌’, ‘답십리 굴다리’등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담은 그림도 전시된다. 전시는 6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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