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배경에는 형태조차 희미한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화면 속 인물 얼굴은 늘 희미하게 번져 있거나 까만 눈동자 없이 흰자위만 보여 어딘지 불안해 보이고, 때때로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인간과 닮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인간의 형체를 갖추지도 못해 이도 저도 아닌 괴물이다.
거대한 사회에 맞선 개인이 느끼는 불안감을 캔버스에 담곤 하는 작가는 8일부터 송현동 이화익갤러리(대표 이화익)에서 열리는 두 번째 개인전 ‘문 없는 방’(Doorless Room)에서도 현대사회에 갇힌 인간의 모습에 대한 탐구를 이어간다.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개인적 유희를 표현한 로봇 시리즈를 선보인 그는 이번 전시에서는 ‘괴물’과 ‘인물’ 시리즈를 20여 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거대한 사회시스템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한 작업이 로봇 시리즈였다. 그러다 매너리즘에 빠졌고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인물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괴물’ 시리즈에 등장하는 생명체는 작가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향받은 모든 것을 되짚으면서 기억 속에 남은 형상들을 조합한 것이다. 괴물은 형체가 불분명한 모습으로 문이 없는 방 안에 갇힌 모습이지만 이 방은 문이 없어 동시에 완전히 개방된 공간이기도 하다.
‘인물’ 시리즈에는 작가 자신뿐 아니라 부모, 부인과 아이, 친구들이 등장하고 실존 인물들은 아니지만 불안감에 떨면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인물들을 그렸다.
문명의 발달로 현대사회는 날로 커지지만 그 속에서 현대인들은 정체성을 잃어간다는 작가의 우려는 회색빛 배경과 화면 속 생명체의 이미지가 점점 뒤섞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눈길을 끄는 것은 흐릿하고 불안한 인물들의 얼굴이 무색할 정도로 얼굴 아래에는 알록달록한 원색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치한 점이다. 작가는 “거대 사회에서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개인은 나약하고 그 삶은 단조롭지만 그런 개개인에게는 또 다양한 삶과 생존 본능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원색 패턴의 옷을 입힌 셈”이라고 설명했다.전시는 21일까지. 02-730-7817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