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냉장고를 열었더니, 어제 사다놓은 야채들이 보이지 않았다. 산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는 것을 깜박 잊었던 모양이다. 브로콜리, 송이버섯, 상추 등이 담긴 검은 봉지가 부엌 뒤쪽 베란다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봉지 안을 들여다보니, 살 때와 마찬가지로 싱싱한 상태였다. 여름이었다면, 짓뭉개지거나 부패의 흔적이 나타났을 것이다. 늦가을의 베란다가 냉장고 안처럼 찬 공기로 채워진 덕분이었다. 하지만 곧 겨울이 들이닥치면, 인간도 냉장고 안처럼 추운 환경에서 한동안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소설가 박민규의 단편소설 「카스테라」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중고가전상에서 한 냉장고를 사들이게 되는데, 워낙 소음이 심했다. 그는 냉장고의 전생이, 1985년 브뤼셀에서 열린 리버풀과 유벤투스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응원단의 마찰로 담장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훌리건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원룸에서 냉장고와 함께 살게 된 주인공은 냉장의 세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냉장고 탄생의 역사뿐만 아니라, “냉장고를 통해, 비로소 인류는 부패와의 투쟁에서 승리”했음을 깨닫게 된다.
한편, 주인공은 인격을 가진 냉장고를 조금 다르게 사용한다. 부패를 막기 위해, 세상에 소중한 것이거나 세상에 해악이 되는 것을 집어넣기로 한 것이다. 제일 먼저 인류를 위해 오랫동안 보관하고 싶은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한 권을 집어넣는다. 다음에는 빚을 많이 져서 세상에 해악인 아버지를 집어넣고, 어머니와 학교도 집어넣는다. 차례차례, 동사무소, 신문사, 오락실, 대기업, 경찰 간부, 벤처기업, 영화감독, 소설가, 취객, 비둘기, 사채업자, 실직자, 노숙자, 국회위원, 그리고 대통령을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미국도 집어넣는다. 중국도 냉장고 안으로 들어간다.
냉장고 안은 “하나의 ‘국제사회’”가 되고, “하나의 세계”로 변한다.
필자는 샐러드용 야채를 조금 꺼낸 후, 남은 식재료를 냉장고에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흔히 부패하면 유명한 정치가나 경제인 그리고 특정인들을 떠올리지만, 우리 모두는 부패의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뜨거운 공기 안에서는 더 쉽게 상한다. 냉장고의 전생인 훌리건처럼, 흥분과 욕심을 바깥으로만 내뿜으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 그 밑에 자신이 깔려 죽기도 한다. 한 사람의 부패는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고……아침 식사를 준비하다보니, 한 양파가 같은 망 안의 다른 양파들을 집요하게 썩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벌써 11월 말이다. 우리는 곧 겨울이라는 이름의 냉장고 안에서 살게 된다. 냉장세계에서는 추워서 조금씩 움츠리면서, 바깥으로만 향했던 욕망의 시선을 자신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까. 자신의 영혼을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을까. 인류를 위한 소중한 존재여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 상한 부분이 있어서 겨울을 맞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부패하지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썩어 문드러지지 않도록! 자칫 타인을 썩게 만들지 않도록, 이 계절에 자신의 영혼과 몸을 더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한 해의 끝이 겨울이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