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이기에 취해 기술에 지배당하는 현대인”
화려한 애니메이션 속 묵직한 메시지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기술의 발전이 자본주의 병폐와 맞물리며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건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기술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나타난다고 봤으니까요”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퍼포먼스로 ‘연극의 미래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영국 극단 1927의 애니메이터이자 예술감독인 폴 배릿이 9년만의 내한공연인 ‘골렘(GOLEM)’의 개막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말했다. 화려한 영상으로 빚어지는 ‘몽환적 무대’에는 묵직한 메시지가 숨어있다.
영국 극단 1927의 애니메이터 겸 예술감독인 폴 배릿이 연극 `골렘`의 첫 한국 공연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났다. [사진제공=LG아트센터] |
극단 1927은 2006년 일러스트레이터 폴 배릿과 작가 수잔 안드레이드가 창단한 젊은 극단으로, 작가, 애니메이터, 배우, 작곡가로 구성된 독특한 조합을 자랑한다. 지난 2007년 어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데뷔작인 ‘비트윈(Between the Devil and the Deep Blue Sea)’으로 5관왕을 차지, 단번에 전 세계 프로듀서와 공연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후 10년 동안 1927 특유의 스타일이 살아있는 작품 5점을 제작했고, 새 작품이 나올때 마다 공연계에선 찬사가 쏟아졌다. 골렘(2014년 제작)은 ‘동물과 아이들이 거리를 점거하다’(2010년ㆍ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초연), 오페라 마술피리(2012년ㆍ베를린 코미쉬 오페라 공동제작)에 이은 네번째 작품이다. 유대인의 오랜 전설인 ‘골렘’에 기초한 이야기로 스마트폰과 디지털기기에 길들여진 현대사회의 모습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유대인 랍비가 만든 점토인형인 골렘은 사람처럼 영혼은 없지만 사람이 하는 이야기나 명령을 이해하고 이행할 수 있다. 1927의 골렘도 주인공(로버트)의 ‘하인’역할로 등장한다.
골렘은 로버트의 회사에서 업무를 대신 처리하기도 하고, 그의 패션스타일에 대한 조언도 한다. 그러는 사이 골렘은 점점 진화하고, 로버트의 골렘 의존도도 높아만 간다. 심지어 자신이 오랜기간 흠모해온 동료 조이에 대한 감정도 골렘의 조언에 따라 흔들린다. 골렘은 SNS기술을 통해 더 많은 여성을 만날 수 있다고까지 귀띔한다. “골렘은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폰을 상징합니다. 편리하려고 개발한 스마트폰에 결국 인간이 끌려다니고 지배당하고 있지 않나요?”라고 반문한 폴 배릿은 “골렘 신화는 여러 버전이 있는데, 우리는 골렘의 기술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싶었죠. 빌게이츠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시작한 마이크로 소프트는 이제 괴물과 같은 큰 기업체가 돼버렸습니다”라고 지적했다.
주제자체가 무겁다보니 자칫하면 무겁게 흘러 지루하고 따분 할 수 있지만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는건 바로 애니메이션의 힘이다. 연극무대에서 보조적 역할에 그쳤던 영상을 주인공으로 끌어들였다. 배우들은 그 영상안에서 연기하며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애니메이션은 폴 배릿이 직접 손으로 그린다.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을 스캔, 컴퓨터로 이미지를 입혀 제작하는 전 과정을 혼자서 진행한다. 컴퓨터로 손쉽게 3D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요즘 기술에 비하면 무척이나 구식인 셈이다. 배릿은 “우리는 최첨단 기술 회사가 아니다. 이러한 수제 작업을 통해 새로운 미학을 개척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연극의 미래는 연극, 영화, 오페라 등 장르적 특성에 매이지 않고 모든 요소를 총망라하는 하이브리드적 특성을 가져야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폴 배릿의 애니메이션과 배우들 연기의 조화도 눈여겨 볼 지점이다. 1927의 공연은 배우들이 애니메이션에 맞춰 동작과 대사, 노래를 불러야하기에 연습기간이 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LG아트센터 관계자는 “일반연극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무대전환과 영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새로운 공연에 목말라 있던 관객들에게 놀라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공연은 16일부터 19일까지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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