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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세 골프소설 21] 프랑스에서 캐디가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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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에서 캐디 어원이 탄생하다. 당시 메리 여왕에 의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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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스포츠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골프를 칠 때 프랑스의 육균사관학교 생도들을 골프클럽을 들게 하는 보조요원으로 썼다. 생도들을 프랑스 말로 ‘카데(Cadet)’라고 했는데 수백 년이 지난 후 현재 캐디(Caddie)의 어원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메리 여왕 덕분에 프랑스에는 골프가 급속도로 퍼졌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스코틀랜드의 골프와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프랑스인들의 독자적인 놀이가 존재했었다. 프랑스어로 ‘주 더 메이(Jeu de Mail)’라는 놀이였다. 스틱은 역시 나무로 만들었으나 공을 때리는 헤드 부분은 나무망치 모양의 옆면인 것이 스코틀랜드의 골프와 달랐다.

공은 돌이나 새의 깃털을 넣어 만든 페더리볼이 아니고 나무로 둥글게 깎아 만든 나무공을 사용했다. 볼의 크기는 스코틀랜드의 페더리볼과 비슷한 크기였다. 대신 코스는 한 홀로 된 1킬로 미터 정도의 긴 것이었다. 그 끝 부분에 목표물을 만들어 놓고 상대방보다 적은 타수로 먼저 맞추는 놀이였다. 잉글랜드에서 행해진 캄부카와 달리 프랑스의 놀이는 ‘팔마(Pal Mal)’라고 불리는 일종의 필드하키, 혹은 크리켓에 가까운 놀이였다.

메리가 결혼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가 되던 1558년에는 잉글랜드도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블러드 메리 1세 여왕이 실각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새로운 여왕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왕좌에 있어서도 함께 여왕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헨리 8세와 두번째 부인이자 훗날 ‘천일의 앤’으로 불렸던 앤 볼렌의 딸로, 스코틀랜드 퀸 메리와는 사촌 고모와 조카 지간이었다.

이 사실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혈통상 잉글랜드의 여왕도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헨리 8세에 의해 박해당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카톨릭 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헨리 8세가 바람을 피워서 난 사생아였기 때문에 적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잉글랜드 사회 내에서 정통 가톨릭 신자였던 스코틀랜드 메리를 잉글랜드와의 통합 여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시아버지였던 프랑스의 앙리 2세 역시 메리가 적법한 잉글랜드의 여왕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던 터였다.

어린 시절 메리는 세 나라 사이에서 그렇게 추대를 받고 있었다. 어쩌면 16세기의 한가운데에서 세 나라는 모두 메리의 품 안에 들어 역사 이래 서유럽 세 나라를 다스리는 최초의 여왕이 될 줄로 생각했다. 그 환상은 그러나 너무도 짧은 시간에 깨지기 시작했다.

메리의 비극은 프랑수아 2세와의 결혼에서부터 이미 잉태되었다. 남편은 어려서부터 병약했으며 허구헌날 병치례를 해야 했다. 중이염으로 고생하던 프랑수아는 뇌종양 합병증으로 인해 결혼 1년여 만에 16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결혼한 지 1년 밖에 안된 시점이었다.

18세에 불과한 메리 역시 졸지에 비운의 왕비가 되어버렸다. 몇달 전 그녀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인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리마저도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메리는 오래전 사망한 아버지 제임스 5세를 비롯해 어머니와 남편까지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그녀를 뒷바침해 줄만한 세력조차 아직 없었다.

메리는 프랑스에서조차 설 땅을 잃었다. 남편 프랑수아 대신 남동생 샤를 9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녀에게 시련은 닥치기 시작했다. 10세에 왕위에 오른 샤를을 대신해서 어머니인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했던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Catherine)이 섭정하기 시작했다. 오래전 메리는 메디치 가문을 향해 장사꾼이라며 시어머니였던 카트린에게 모욕을 준 적이 있었다. 메리의 목숨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그나마 스코틀랜드 뿐이었다.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가기는 싫었다. 그 곳에서의 기억이라곤 좋을 게 없었다. 야만스럽고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고 있는 귀족들만의 세상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잉글랜드로부터 위협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스코틀랜드에서 메리의 측근은 거의 없다는 게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기 힘든 이유였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1561년 8월9일 메리는 결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귀족들은 겉으로는 반겼지만 프랑스 사람이 되어버린 여왕을 좋아할 리 없었다. 메리는 남편과의 사별의 상처와 외로움을 누구한테 호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유일한 소일거리는 에딘버러에서의 골프였다. 여왕에게 골프란 정신적인 고통을 이기는 최대의 분출구였다. 메리의 골프 실력은 당시 사회에서 같은 여성 중에서는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프랑스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던 여왕은 국정을 처리하는 데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반대하는 귀족들도 많았다. 메리가 떠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카톨릭을 믿었던 스코틀랜드는 어느새 프로테스탄트로 종교마저 바꿔지고 있었다. 16세기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마틴 루터에 의한 청교도혁명과 종교개혁이 스코틀랜드에도 예외일 순 없었다.

가톨릭이 추방되다시피 하는 나라 분위기에서 여왕의 입지는 좁아지고만 있었다. 아름다운 모습의 늘씬한 여왕을 국민들이 모두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가톨릭 신봉자인 여왕을 못마땅해하던 분위기였다. 스코틀랜드 궁에서는 적어도 메리의 신하는 한명도 없는 듯했다. 절망적인 삶 속에서 메리는 본국에서조차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 필자 이인세 씨는 미주 중앙일보 출신의 골프 역사학자로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우승을 현장 취재하는 등 오랜 세월 미국 골프 대회를 경험했으며 수많은 골프 기사를 썼고, 미국 앤틱골프협회 회원으로 남양주에 골프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저서로는 <그린에서 세계를 품다>, <골프 600년의 비밀>이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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