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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프상식백과사전 158] 불멸의 골퍼 보비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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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트로피옆에서 포즈를 취한 보비 존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남화영 기자] 역사상 골퍼에게서 가장 존경받는 전설 같은 보비 존스(로버트 타이어 존스).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정상에서 홀연히 골프계를 떠났다. 박수칠 때 떠날 줄 알았던 현인(賢人), 은퇴하고는 변호사와 공학자와 작가로 활약한 기인(奇人),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내셔널 골프클럽을 만든 거인(巨人). 올해로 제 83회 마스터스가 열리고, 오늘 처음으로 오거스타내셔널여자아마추어에서 챔피언이 탄생한 날인만큼 이 대회를 만든 설립자의 골프 인생 이야기를 꺼내 본다.

딕시랜드에서 온 천재 소년
변호사 로버트 P. 존스의 아들 바비 존스는 태어날 때 약골이었다. 딱딱한 음식을 먹지도 못하는 병약한 아이였다. 어느 날 저녁, 부친의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은 5번 우드가 그의 첫 번째 클럽이었다. 존스는 친구와 그걸로 이스트레이크까지 울퉁불퉁한 길을 볼을 치면서 왔다갔다하는 놀이(우리 개념으로는 자치기)를 했다. 그리고 5살 때 애틀랜타 근교 이스트레이크CC에서 골프를 접하면서 인생이 바뀐다.

“처음 이스트레이크 코스에 섰을 때 이상한 스릴감이 가슴을 때리는 기분을 느꼈다”고 그는 25살에 쓴 자서전 <페어웨이를 내려가며(Down the Fairway)>에서 적었다. 골프의 신내림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정식 스승도 없었다. 다만 이스트레이크 챔피언이던 스튜어트 메이든의 스윙을 어깨너머로 보고 따라했을 뿐이다. 존스는 메이든의 부드러운 스윙을 보면서 똑같이 따라하려 노력했다. 메이든의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눈은 항상 볼에 가 있었고 정확한 히팅 포인트를 찾았다.

존스는 스스로 겸손하게 부인하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9살에 16살의 경쟁자를 제치고 애틀랜타 주니어 타이틀을 차지했고, 14살에는 이스트레이크 인비테이셔널에 참가해 조지아주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한다. ‘딕시랜드(미국 남부)에서 온 뉴 키드’는 금방 센세이션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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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보코 바지를 입은 전성기 시절의 보비 존스 스윙 피니시.


하지만 어린 나이에 뜬 스타들이 그렇듯 급작스런 스타덤과 대중의 과도한 관심이 그에겐 오히려 짐이었다. 그후 메이저에서 1승을 거두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경기장에서 그를 쳐다보는 갤러리의 눈길이 대회 기간 내내 부담이었다. 내적인 완성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였던 존스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서 경기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시합 중에만 체중이 8kg나 빠지기도 했다.

절친한 친구이면서 존스의 전 경기를 취재했던 골프 칼럼니스트 O.B. 켈러는 존스의 선수 시절을 ‘가난한 7년, 부유한 7년’으로 구분한다. 전반기인 1916년에서 1923까지 우승 없이 1승을 위해 10번의 패배를 보는 시기였다.

19살인 1921년 영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다.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그는 골프 인생의 가장 불명예스럽고도 치욕적인 경험을 했다. 3라운드에서 전반 9홀을 46타로 마무리했다. 후반 홀에서는 설상가상이었다. 파4 10번홀에서 더블 보기를 하더니 11번홀에서 지옥 벙커에 볼을 빠뜨리고 만다. 망연자실한 상태가 된 존스는 자신의 볼을 집어들어 경기를 포기하고는 스코어 카드마저 찢어버린다. 그리곤 켈러에게 내뱉는다. “내가 도대체 우승이란 걸 해보기는 할까요?” 하지만 당시 해프닝은 두고두고 존스의 골프인생의 후회가 된 행동으로 남는다.

목마른 첫 우승은 1923년에서야 힘겹게 찾아왔다. 뉴욕 인우드에서 열린 US오픈에서 2위 크루이생크와 줄곧 3타 격차를 벌이면서 앞서갔다. 막판으로 갈수록 존스는 다시 갤러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긴장하는 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16번 홀부터 보기-보기-더블 보기를 기록하다 결국 그날은 비겼다. 당시 US오픈은 마지막날 동타가 되면 다음날 18홀 경기를 다시 치렀다. 다음날 존스는 1타 차로 힘겹게 우승을 차지한다. 그렇게 우승을 한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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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 존스는 28세에 메이저 13승을 달성하면서 은퇴한다.


8년 동안 메이저 우승만 13번
1923년 우승 이후 1930년 은퇴할 때까지 8년간을 디오픈 3번, 브리티시아마추어 선수권 한 번, US오픈 4번, US아마추어 선수권에서 5번 우승한다. 메이저 대회 21번 참가에 13번 우승했으니 승률 62%였다. 월터 하겐, 진 사라센 등 당시 골프계를 주름잡던 스타들도 넘쳐났지만 존스가 참가한 메이저 대회에서는 우승을 넘볼 수 없었다.

존스가 자신의 꿈을 그랜드슬램으로 잡은 건 1926년 브리티시아마추어선수권이 메이저 대회로 승격되면서부터였다. 존스는 당시 미국, 영국의 대표적인 시합을 석권하는 그랜드슬램을 목표로 했다. 그 해에 US오픈과 디오픈에서 우승했지만 US아마추어는 2위, 영국에서는 매치플레이로 열리던 4강전에서 패했다.

스코틀랜드 뮤어필드에서 열린 브리티시아마추어에서 처음엔 기세등등했다. 4라운드까지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준결승에서 앤드루 존스톤과의 경기가 예정된 아침에 담에 걸렸다. 왼쪽으로 기대 잠을 잤는데 그게 탈이 났다. 경기를 할지 그만둘지 고민했다. 존스는 ‘몸 상태를 털어놓는다면 상대방에게 몸이 불편한 상대와 경기한다는 부담을 지우는 일’이라 생각하고 내색하지 않고 경기를 끝까지 이어갔다. 중간에 그만두지도 않았다. 5년전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게임이 안 풀려 중간에 볼을 집어들었던 잘못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우승을 놓친 뒤에 뉴욕 발투스롤에서 열린 US아마추어선수권에서도 결승전 매치플레이에서 조지 폰 엘름에게 졌다. 하지만 이후 그에게는 그랜드슬램이 뇌리에 박혔다.

존스의 비범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25년 매사추세츠 위스터에서 열린 US오픈 11번 홀에서였다. 아이언 샷 난조로 2타를 손해본 존스의 볼이 그린 왼쪽의 풀숲에 떨어졌다. 다가가 치려고 어드레스 하는 순간 볼이 자리를 조금 벗어나 움직인 것 같았다. 심판도 갤러리도 못봤지만 존스는 “볼이 움직였다”고 경기위원에게 신고했고, 스스로 1벌타를 먹었다. 그 때문에 마지막 라운드에서 맥파렌과 동타를 이루었고 플레이오프에서 뒤져 2등을 했다. 메이저 대회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다. 골프에서는 플레이어가 곧 심판이라는 미덕을 살린 일화로 유명하다. 기자들이 ‘왜 그걸 신고했느냐’고 질문했을 때 존스의 답변 또한 명언으로 남았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내가 은행강도를 하지 않았다고 그걸로 칭찬받을 수 있겠나?”

1930년 28세 나이에 4대 메이저를 모조리 휩쓸면서 그랜드슬램을 완성했다. 존스는 당시 인기 스타이던 프로골퍼 월터 하겐과 같은 쇼맨십은 없었다. 갤러리가 모여들면 코스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긴장을 떨치려 애썼고, 경기 중에는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골프사상 최초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자 누구나 프로로 전향해 엄청난 돈을 벌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돌연 핵폭탄급 선언을 한다. “나는 게임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곧 골프계를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이를 존스의 갤러리 공포증 때문으로 풀이했다. 켈러 기자는 “대회 때마다 갖던 엄청난 스트레스를 벗어나 친구들과 조용히 골프를 즐기려고 은퇴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존스는 나중에 털어놓았다. “골프는 생계 수단이나 절대 과제가 아니라 게임일 뿐이다. 우선 순위를 따진다면 내 아내와 자식이 첫 번째, 법률가로서의 직업과 일이 두 번째, 마지막으로 골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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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 존스의 무덤에는 골프볼이 놓여져 있다.


선수 아닌 골퍼로의 후반생
골프 선수로서의 보비 존스 이면에는 오늘날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마스터스 대회를 열고 명문 골프장인 오거스타내셔널을 설립한 사람이다. 당시에 동영상 레슨을 찍을 정도로 골프 레슨의 규범을 세웠던 보비 존스가 떠오른다.

아마추어로만 평생을 보낸 그였다. 보통 선수로 이런 성과를 거두려면 피나게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존스는 일년에 고작 3개월만을 골프에 바쳤다. 나머지는 법률, 영문학, 공학 공부에 전념했다. 18살에 조지아 공대에서 기술엔지니어 학사자격을 얻는다. 공대 학장은 그를 “점잖고 겸손하며 골프에 대해 말하지 않는 친구”로 기억한다. 21살에 하버드대 영문학과에 들어갔으나 시합 때문에 얼마 다니지 못한다. 24살에는 에모리대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일년 뒤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는 아버지 법률 회사에 들어간다.

특이하지만 존스는 나중에 스팔딩 등 장비 사업에 참여했다. 손으로 만든 스코틀랜드산 클럽보다 감도를 높여 만들어 판매했고 1932년 보비 존스의 이름이 새겨진 클럽이 출시돼 40년간 인기를 누렸다. 워너 브러스와 함께 18개의 골프 레슨 필름을 만들었고 <내가 골프를 하는 법(How I Play Golf)>이라는 레슨 서적도 냈다(나중에 타이거 우즈도 같은 이름의 책을 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인근 오거스타에 오거스타내셔널을 뉴욕의 금융인 출신인 클리포드 로버츠와 함께 설립했다. 코스 설계는 당시 사이프러스포인트를 만들었던 알리스터 매킨지에게 의뢰했다. 좋은 코스를 연 뒤에 자신이 알던 친구들을 초청한 대회를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오거스타내셔널 인비테이셔널’이었다. 하지만 대회 명칭은 몇 년 뒤부터 마스터스로 바뀐다.

골프에 다양한 업적을 남긴 존스의 말년은 우울하다. 1948년 등과 목에 척수공동증이라는 병을 앓으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다 결국 휠체어 생활에 의존하게 된다. 가장 부드러운 스윙을 자랑하던 그가 인생 후반기를 휠체어에 의존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1971년 69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애환이 어린 세인트 앤드루스 10번홀은 ‘보비 존스’홀로 명명되었다. 메리온 G.C 11번홀에도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30년 9월27일, 이 홀에서 로버트 타이어 존스 주니어는 US아마추어 선수권을 우승함으로써 그랜드슬램을 완료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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