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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러버전쟁과 브랜드 유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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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전설적인 책이 된 빌 바우어만의 'Jogging A Physical Fitness Program for All Ages'(1966년)


# 1968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상원의원 스톰 서몬드는 동네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달리기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조깅이 일반화됐지만 이때만 해도 길거리를 달리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당했다. 달리기는 복싱 등 운동선수나 하는 것이었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은 '달리기라는 의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밤에 뛰면, 범죄자로 의심을 받을 우려가 있어 아침에 뛴다'고 보도했다.

# ‘조깅 열풍’을 일으킨 이는 나이키의 공동창업자인 빌 바우어만이다. 유명한 육상코치인 바우어만은 1962년 뉴질랜드 여행을 갔다가 조깅 프로그램을 배웠고, 1966년 'Jogging A Physical Fitness Program for All Ages'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통해 미국에 조깅을 소개했다. 중요한 것은 조깅열풍이 일어나면 나이키를 비롯해 운동화업체들이 기록적인 성장을 거듭했다는 사실이다. 운동문화가 산업생태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 요즘 탁구가 대박이다. 최강 중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일본에게 따라잡히고 있는 엘리트얘기가 아니다.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고 있는 생활체육 얘기다. 탁구를 치는 공간도 기존 동네탁구장에서 동호인 중심의 클럽으로 바뀌었다. 탁구레슨을 받는 동호인도 수두룩하다. 업계에서는 동호인만 못해도 100만 명이라고 추산한다. 이쯤이면 관련 산업도 호황을 누린다. 조깅처럼 말이다. 당연히 지금 한국에서는 탁구용품이 핫(hot)하다. ‘선수 출신보다 탁구를 더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한 이병상 라이더코리아 대표는 “제가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듯 탁구용품 사업을 하면 다 돈 법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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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탁구러버 생산회사인 독일 ESN을 방문한 이옥규 게보코리아 대표(왼쪽). ESN과 같은 회사는 기술보안이 철저한 것으로 유명하다.


# 탁구용품은 ITTF(국제탁구연맹)의 승인여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경기력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탁구대, 네트, 러버, 공은 승인대상이다. 반면 라켓(블레이드), 가방, 의류 등은 승인이 필요없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분야는 러버다. 탁구대, 네트, 라켓은 내구성이 뛰어나 수요발생이 상대적으로 적다. 공은 소모품이지만 아무래도 단가(가격)이 낮아 이문이 적다. 반면 러버는 좋은 것은 8만 원(테너지의 소비자가)에 달할 정도로 단가가 높고, 소모성 및 교체욕구도 커 메이커들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진다. 러버를 판매하는 회사는 국내에만 못해도 15개가 있다.

# 탁구러버는 톱시트와 스펀지로 구성된다. 톱시트도 중요하지만 스펀지 기술이 독보적인 독일과 일본이 전 세계 러버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물론 중국업체들이 뛰어난 가성비와 엄청난 자체시장을 앞세워 많이 올라왔지만 아직 대대적인 지형변화로는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현재 일본의 버터플라이와 독일의 ESN이 러버의 양대산맥이다. 전자는 주로 자사제품에, ESN는 수십 개의 용품회사에 러버를 납품한다. 한국은 유독 버터플라이(러버 브랜드는 테너지)의 강세가 두드러진다. 국내 연간 러버 판매량은 적게는 50만 장, 많게는 300만 장까지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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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규러버' 제작 계약서를 체결한 이옥규 게보코리아대표(왼쪽)와 유남규 감독.


#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내 러버시장에 최근 작은 파란이 하나 일어났다. 유럽에서도 10위권 밖인 게보(GEWO)가 '유남규 러버'를 출시했는데, 한달도 안 돼 8,000개의 예약판매를 완판해버렸기 때문이다. 게보코리아의 이옥규 대표는 “출시기념으로 1+1을 시행했는데, 반응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째 독일회사가 ESN를 통해 한국인의 이름을 브랜드로, 한국어설명까지 넣어 제작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테너지를 능가하는 품질이다”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김택수가, 또 유럽에서는 유명하지 않은 한 선수가 자신의 이름을 단 러버를 앞서 출시한 바 있지만 ESN과 같은 메이저업체가 아니었기에 시장에서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버터플라이는 자사제품에만 사용). 사실상 이번 ‘유남규 러버’가 세계 최초인 셈이다. 참고로 생산이 용이한 라켓은 이미 국내외 선수들의 이름 딴 제품이 즐비하다.

# 게보 측에 따르면 유남규 감독(삼성생명탁구단)은 꼼꼼한 성격만큼 자신의 이름을 단 이번 러버에 심혈을 기울였다. 디자인, 특성설계, 성능테스트 등에 모두 관여했고, 품질에 대만족을 나타냈다. 현재 일본오픈에 참가 중인 유남규 감독은 “독일 일본에서 생산되어 판매되는 러버 중 세계 최초로 러버 설명서가 한글로 돼 있다. 내가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켰다. 탁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좋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하고 싶은 소망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유 감독은 독일 게보 본사의 홍보대사를 맡았고, 품질관리 및 유통까지 대부분의 내용을 자신과 협의하도록 계약했다. 그래서 아직 러버의 최종가격(4만5,000원~5만 원 추정)도 정해지지 않았다. 너무 비싸도, 덤핑으로 파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게보는 유남규 러버 출시와 함께 ‘유남규 탁구가방’과 의류도 내놓았다. 블레이드(라켓)은 테스트 중이고, 신발도 유남규 감독이 직접 신으면서 테스트 중이다.

# ‘자신의 라켓을 가진다는 건, 말하자면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가진 것이란 얘기야.’ 인기작가 박민규의 소설 <핑퐁>에 나오는 말이다. 탁구가 처음으로 올림픽종목으로 채택된 88 서울 올림픽에서 남자단식 금메달을 땄고, 이후 세계적인 선수와 지도자로 이름을 떨쳐온 유남규 감독이 블레이드를 넘어 러버까지 자신의 이름을 걸어 만든 것은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탁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인 주세혁, 역시 올림픽 챔피언에 빛나는 유승민(IOC선수위원), 그리고 현정화(렛츠런파크 탁구단 감독)까지 향후 더 많은 ‘한국선수 러버’가 나왔으면 한다. 그리고 탁구용품이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시장도 확대되고 있는 만큼 한국이 독일, 일본을 능가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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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규 러버'의 전면과 후면. 후면 사용설명서는 독일어와 함께 한글로 적혀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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