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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전드 오브 풋볼]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으로, 유벤투스에 첫 빅이어를 선사한 3인방

[헤럴드경제 스포츠팀=김유미 기자] 32번의 리그 우승, 11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 3번의 유로파리그 우승. 세리에A 최고의 명문구단 유벤투스의 업적이다. 하지만 유벤투스는 자국 무대를 주름잡았지만, 유럽 제패의 꿈은 달성하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팀들은 유럽의 최강이었는데도 말이다.

유벤투스는 1980년대 중반이 돼서야 팀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을 차지하면서 오랜 한을 풀 수 있었다. 이탈리아 팀으로는 이미 1960년대 각각 빅이어를 들어올렸던 인터밀란과 AC밀란에 이어 세 번째 우승이었다. 헤이젤 참사로 인해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기는 힘들었지만 어찌됐든 유벤투스는 새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이번 <레전드 오브 풋볼>은 84-85시즌 유럽 무대를 꿈꾸던 유벤투스에 첫 빅이어를 안긴 3인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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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의 골 셀러브레이션으로 유명한 마르코 타르델리. 사진은 대회 우승 후 월드컵 트로피에 입맞춤하는 장면이다. [사진=FIFA 홈페이지]


마르코 타르델리 - 골 셀러브레이션의 전설

첫 번째 주자는 마르코 타르델리다. 195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타르델리는 파워풀하면서 기술도 갖춘 미드필더였다. 주로 중앙 미드필더나 수비형 미드필더를 소화했는데 태클과 슈팅도 수준급이었다. 72-73시즌 세리에C 피사에서 데뷔해 두 시즌을 보냈고, 세리에B 코모를 거쳐 75-76시즌 다른 이탈리아 빅클럽들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유벤투스에 입단했다.

타르델리는 유벤투스에서 10시즌을 보내는 동안 259경기에 출장해 35골을 기록했다. 유벤투스에서의 시간은 그의 전성기였고 세리에A 5회,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을 비롯해 UEFA컵, UEFA 컵 위너스컵, UEFA 슈퍼컵, 유러피언컵 우승을 두루 경험했다. 잠시 수비수를 맡기도 했지만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였다.

1980년대 초반에는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혔고, 2007년 <타임즈>가서 선정한 가장 투지 있는 축구선수 50인 중 10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85-86시즌 인터밀란으로 이적한 타르델리는 두 시즌 동안 43경기에 나섰고 이후 스위스의 상 갈렌에서 한 시즌을 활동한 뒤 현역에서 은퇴했다.

타르델리는 이탈리아 국가대표로도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총 81번의 A매치를 치렀고 6골을 기록했다. 1976년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유로 1980에 모두 출전해 4강에 진출했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79년 피파 베스트11에 선정됐고, 유로 대회 베스트 11에도 이름을 올렸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2골을 터트렸는데 그 중 하나가 결승에서 만난 서독을 상대로 작성한 팀의 두 번째 골이었다. 득점을 기록한 타르델리는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주먹을 꽉 쥐고 벤치 앞으로 달려가는 액션을 취했는데, 이는 훗날 ‘타르델리의 포효’라고 불리는 골 셀러브레이션의 고전이자 그를 대표하는 유명한 장면이 됐다. 당시 이탈리아는 서독을 물리치고 3-1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1983년부터 85년까지 대표 팀 주장을 맡았던 타르델리는 1988년을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물러났다.

타르델리는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1988년 이탈리아 16세 이하 대표 팀 감독을 맡았고, 21세 이하 대표 팀에서 수석코치를 지냈다. 세리에C 코모세리에B 체세나에서 감독을 지냈고, 다시 이탈리아 21세 이하 대표 팀을 맡아 2000년 UEFA U-21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8강행을 이끌었다.

성공적인 감독 커리어를 이어나가던 그는 00-01시즌 인터밀란의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연이은 부진으로 단 한 시즌을 보낸 뒤 경질됐다. 이후 바리, 이집트 대표 팀을 거쳤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스승이었던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이끄는 아일랜드 대표 팀의 코칭스태프로 활동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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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와 프랑스 국가대표의 레전드였던 선수생활을 지나 지도자와 축구행정가의 삶을 살았던 미셸 플라티니의 UEFA 회장 재임 시절. [사진=UEFA 홈페이지]


미셸 플라티니 - 레블뢰 군단의 캡틴

두 번째 주인공은 선수 은퇴 후 축구 행정가이자 UEFA 회장으로 더욱 유명세를 떨친 미셸 플라티니다. 플라티니는 프랑스 출신으로 어린 시절 AS죄프에서 활동했고 낭시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플레이 메이커와 패스 마스터 역할을 소화했지만 득점력도 좋아 경기 평균 0.5골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낭시에서 7시즌 동안 꾸준한 성장을 보인 플라티니는 79-80시즌 빅클럽들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생테티엔으로 이적했다. 이적 두 번째 시즌에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FA컵인 쿠프 드 프랑스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82-83시즌 세리에A 최강 유벤투스로 이적했다.

플라티니는 유벤투스에서 본인의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다. 이 시기 그는 발롱도르 3회 수상 등 셀 수 없이 많은 타이틀을 얻었다. 플라티니는 강력한 중거리 슈팅과 마무리 능력으로 83-84시즌부터 세 시즌 연속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팀의 에이스로 부상했다. 두 번의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둔 플라티니는 유벤투스에서 보낸 5시즌 동안 총 222경기에 출장해 103골을 기록했다.

그는 프랑스 국가대표 선수로도 맹활약했다. 1979년부터 87년까지 주장 완장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당시 ‘레블뢰 군단’은 플라티니를 중심으로 루이스 페르난데스, 알랭 지레스, 장 티가나로는 ‘매직 스퀘어’를 구성했다. 프랑스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준결승에 올랐지만 두 대회 준결승에서 연속해서 만난 서독에 패배하며 고배를 마셨다.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유로 1984에서 프랑스는 마침내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 대회에서 플라티니는 조별리그 3경기에서 두 번의 해트트릭을 포함해 7골을 터트렸고, 준결승과 결승에서도 1골씩을 추가해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플라티니는 지네딘 지단이 등장하기 전까지 프랑스 아트 사커의 기반을 닦은 선수이자 프랑스 대표 팀의 상징으로 회자되었다.

플라티니는 1987년 현역에서 물러난 뒤 지도자와 축구행정가로서 축구 인생을 이어갔다. 1988년부터 92년까지 프랑스 대표 팀을 맡았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7년부터 올해 5월까지는 UEFA 회장을 지냈는데, 차기 FIFA 회장 후보로 물망에 올랐지만, FIFA 회장이었던 제프 블래터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결국 UEFA와 아름답지 못한 이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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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두 번이나 유벤투스를 맡아 팀을 유럽 최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92-93시즌 UEFA 유벤투스의 슈퍼컵 우승 당시 모습. [사진=UEFA 홈페이지]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명장

마지막 주인공은 유벤투스의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끌었던 당시 사령탑 지오반니 트라파토니다. 이탈리아의 명장으로 꼽히는 트라파토니는 선수 시절에도 실력이 좋은 수비수였다. AC밀란의 주축 선수로서 13시즌 동안 274경기를 소화했고, 이탈리아 국가대표 선수로 1962년 칠레 월드컵에 출전하기도 했다. 1972년 은퇴 직후 AC밀란 유소년 팀 감독을 지낸 뒤 1975년 AC밀란 1군 감독을 맡았다.

트라파토니가 유벤투스에 새 둥지를 튼 것은 76-77시즌이었다. 주세페 푸리노, 마르코 타르델리, 미셸 플라티니 등 좋은 선수들을 보유한 유벤투스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며 세리에A 6회 우승을 포함해 UEFA컵, 유러피언 슈퍼컵, 인터콘티넨탈컵 등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유벤투스 지휘봉을 잡은 10년 간 450경기에서 54%가 넘는 승률을 기록했고, 이후 1991년 다시 유벤투스로 부임했을 때에도 53%에 가까운 승률을 올렸다. 특히 720골 334실점으로 낮은 실점률을 보였는데, 이는 수비진을 훌륭히 지휘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치다.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를 떠나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다음 행선지인 인터밀란에서도 세리에A, 수페르코파 이탈리아, UEFA컵에서 우승을 기록했고, 바이에른뮌헨에서도 독일에서 열린 모든 대회를 제패했다. 2000년에는 이탈리아 대표 팀을 맡았는데 2002 한일 월드컵에 출전해 16강에 진출했다. 당시 한국과의 16강 경기에서 크게 분노하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에 잡혀 한국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유로 2004에서도 조별리그 탈락의 고배를 마시면서 트라파토니는 결국 아주리 군단을 떠났다. 후임 감독인 마르셀로 리피가 2006 독일 월드컵 우승을 이뤘고 트라파토니는 벤피카, 슈투트가르트, 잘츠부르크, 아일랜드 대표 팀 등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다혈질적인 성격이 때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감독으로서 1,382경기 51%대 승률의 대기록을 세웠다.

84-85시즌 유벤투스에 첫 빅이어를 안긴 3인방 대해서는 ‘축덕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해축야화 45화’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해축야화는 매주 금요일에 1부가, 토요일에 2부가 업로드 되며, 팟캐스트 어플 ‘팟빵’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레전드 오브 풋볼은 축구 팟캐스트 ‘해축야화’의 한 코너입니다. 아래 URL을 클릭하면 바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069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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