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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전드 오브 풋볼] ‘우리도 빅클럽이었다고!’ 2000년대 초반 강팀 발렌시아 4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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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네빌은 지난 시즌 도중 발렌시아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끝내 팀을 살리지는 못했다. [사진=AP 뉴시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김유미 기자]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양분하는 프리메라리가(이하 라리가)가 처음부터 양강 체제였던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레알 마드리드와 같은 연고지를 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강세가 두드러졌고, 세비야나 비야레알 등의 클럽들도 꾸준한 성적을 내왔다. 그리고 발렌시아가 주름잡던 시절도 있었다.

불과 두 시즌 전인 14-15시즌까지만 해도, 발렌시아는 5위 밖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라리가 전통강호였다.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1위 다툼 속에서 3위를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난 시즌 발렌시아는 2000년대 들어 가장 낮은 순위(12위)를 기록했다. 중위권에 해당하는 성적이지만 지금까지 줄곧 좋은 성적을 거둬왔던 발렌시아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시즌 도중 감독 교체를 단행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 시즌, 발렌시아의 성적은 여전히 초라하다. 10라운드가 지난 현재 14위에 그치고 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부진이 이어지고 있지만 발렌시아는 2000년대 초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98-99시즌 국왕컵 우승, 00-01시즌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01-02시즌 라리가 우승과 03-04시즌 더블 달성(라리가, 유로파리그)까지 발렌시아는 스페인 최고 팀이었다. 당시 발렌시아는 초호화 선수보다는 젊고 가성비 좋은 선수들로 팀을 꾸렸다. 이번 레전드 오브 풋볼은 2000년대 초 발렌시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4인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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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카니사레스 - 평생 2인자였던 비운의 골키퍼


산티아고 카니사레스는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골키퍼다. 1988년 레알 마드리드에서 프로에 데뷔했고, 데뷔전을 클린시트로 장식했다. 엘체, 셀타 비고 등 여러 클럽으로 임대를 다니며 경험을 쌓은 카니사레스는 1994년 레알 마드리드로 복귀했다. 그러나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 골키퍼는 독일의 유로 1988 4강,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유로 1992 준우승 등을 이끈 베테랑 보도 일그너였다. 결국 카니사레스는 주전 경쟁에서 밀리면서 1998년 발렌시아로 이적했다.

카니사레스는 자신의 선수 생활 전성기를 발렌시아에서 보냈다. 00-01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한 발렌시아는 바이에른뮌헨과 맞붙었고, 카니사레스는 당시 상대 팀 골키퍼였던 올리버 칸과 말 그대로 ‘미친’ 선방쇼를 선보였다.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패했지만 카니사레스는 20001 UEFA 선정 베스트 일레븐에 골키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는 2008년 발렌시아에서 은퇴했는데, 새 감독 로날드 쿠만과의 불화가 원인 중 하나였다. 쿠만 감독은 카니사레스의 훈련 참여를 제한했고, 이미 시즌은 진행되고 있었다. 새 감독이 부임한 후 팀이 강등 위기에 처하자 카니사레스가 다시 기용됐지만 2008년 클럽 커리어 통산 500번째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카니사레스는 오랜 기간 스페인 대표 팀을 이끈 선수였다. 1985년 16세 이하 대표 팀을 시작으로 각급 대표 팀을 모두 거쳤고, 1992년에는 자국에서 개최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듬해 성인 대표 팀에 발탁되면서 A매치 46경기를 소화했다. 하지만 카니사레스는 대표팀에서 운이 없었다. 1990년대에는 현재 마르세유 단장인 안도니 수비사레타에 밀려 주로 서브 골키퍼였고, 2002 한일 월드컵과 유로 2004에서는 이케르 카시야스라는 신성의 등장에 출전기회를 잃었다.

특히 2002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부상은 선수 인생에 치명적이었다. 당시 카니사레스는 카시야스와 주전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월드컵을 목전에 둔 어느 날, 그는 떨어지는 향수병을 발로 받으려다 부상을 입으면서 대표 팀에서 낙마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축구선수들의 황당한 부상’으로 회자되고 있다. 결국 갓 대표 팀에 승선하며 이름을 알리던 카시야스가 월드컵에 출전했다. 올리버 칸과의 맞대결에서 승부차기를 선방해내던 카니사레스가 한국과 만났더라면 한국의 4강 진출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많았다. 카니사레스는 2006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했지만 한 경기를 소화한 뒤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로베르토 아얄라 - 발렌시아의 전성기를 함께한 선수

아르헨티나 출신의 로베르토 아얄라는 페로 카릴 오에스테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91년에는 성인 팀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생쥐를 닮은 외모로 팬들로부터 ‘엘 라톤(생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로 데뷔 4년차인 1994년 아르헨티나 명문 클럽 리버 플레이트로 이적해 자국 축구 팬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이적과 동시에 안정적이고 뛰어난 수비로 리버플레이트를 리그 정상에 올려놓았고, 95-96 시즌부터 세리에A 나폴리로 이적하면서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3년 동안 나폴리 수비의 주축으로 활약한 아얄라는 1998년 세리에A 명문 AC밀란으로 이적했고, 같은 해 열린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해 팀을 8강에 올려놓았다. 첫 시즌과 두 번째 시즌을 합해 35경기를 소화한 아얄라는 30년 만의 아르헨티나 출신 AC밀란 선수에 거는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지만, 안정적인 수비는 여전했다. 이후 그는 00-01시즌을 발렌시아에서 맞이하게 된다.

아얄라는 발렌시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적 첫 시즌 아얄라는 발렌시아를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려놓으며 최고 수비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고 2004년까지 발렌시아 전성기를 함께 했다.

아얄라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2002 한일 월드컵에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2006 독일 월드컵에 출전해 8강에 올랐다. 독일과 8강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했는데, 당시 주장이었던 아얄라는 승부차기에서 실축하면서 쓴맛을 봤다. 그는 2007년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또 같은 해인 2007년 발렌시아 단장과의 불화로 비야레알로 이적했는데, 이적과 동시에 사라고사가 곧바로 바이아웃을 제시해 아얄라를 이적시켰다. 이후 사라고사에서 3년을 보냈고, 2010년 아르헨티나에서 1년을 보낸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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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와 발렌시아의 주전 공격수였던 파블로 아이마르. 170cm의 단신인 그는 리오넬 메시의 우상이었다. [사진=UEFA 홈페이지]


파블로 아이마르 - 리오넬 메시의 우상


파블로 아이마르는 로베르토 아얄라와 같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뛰어난 테크닉으로 유명했고, 발렌시아에서 활약할 당시에는 ‘다른 선수보다 한 차원 높은 플레이를 하는 플레이메이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신장은 170cm에 불과했지만, 전방 드리블과 넓은 시야, 창의적인 패스 등 다양한 장점을 갖춘 선수였다. 아이마르는 작은 키 때문에 ‘어릿광대’,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리오넬 메시가 그를 자신의 우상으로 꼽기도 했다.

아이마르는 17살에 아르헨티나 명문 리버플레이트에서 프로에 데뷔했다. 그의 아버지는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할까 우려했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다니엘 파사렐라의 설득으로 프로가 됐다. 20살이었던 99-00시즌에는 32경기에 출전해 13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에이스로 떠올랐고 00-01시즌 발렌시아로 이적했다. 아이마르의 이적료는 2,400만 유로, 약 300억 원에 달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는 발렌시아로 이적하자마자 키 플레이어로 활약했다.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공격을 이끌었고,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의 수제자가 됐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을 경험했고, 01-02시즌에는 라리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다음 시즌에도 챔피언스리그 최다 도움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친 아이마르는 03-04시즌 UEFA컵과 UEFA 슈퍼컵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때 디에고 마라도나는 아이마르에 대해 “아이마르는 내가 돈을 주고서라도 보고 싶은 유일한 선수다. 리켈메나 사비올라보다도 한 수 위”라며 극찬했다.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지만 이후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 라니에리 감독 부임 후 출전기회를 잡지 못했고 결국 사라고사로 이적했고, 아이마르의 공백은 다비드 실바와 후안 마타가 메웠다. 사라고사에서 팀의 강등을 막지 못하면서 벤피카로 이적했는데, 이때 사비올라, 앙헬 디 마리아, 오스카 카르도소 등 초호화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는 벤피카에서 보낸 5시즌 동안 리그 우승 1회, 컵대회 4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말레이시아를 거쳐 리버플레이트로 복귀한 뒤 은퇴했다.

가이스카 멘디에타 - 발렌시아의 캡틴, 그리고 무관왕

가이스카 멘디에타는 스페인 출신으로, 주로 윙어나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을 맡았다. 빌바오 출신이며 바스크 혈통을 이어받은 맨디에타는 17세에 카스테욘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1992년 발렌시아로 이적한다. 당시 발렌시아는 평범한 팀이었다. 멘디에타는 어느 포지션에서든 제 역할을 해내는 놀라운 체력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크로스, 드리블, 슈팅, 프리킥 능력까지 갖춘 만능이었다.

95-96 시즌 발렌시아는 라리가 2위에 오르며 성장세를 보였고, 멘디에타는 주장 완장을 달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발렌시아는 99-00시즌과 00-01시즌 2년 연속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랐고, 2번 연속 준우승을 차지했다. 멘디에타는 2회 연속 UEFA에서 주어지는 베스트 미드필더 상을 수상하며 뜻 깊은 시즌을 보냈다. 발렌시아의 전성기를 이끌기는 했지만, 정작 멘디에타는 라리가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멘디에타의 선수 인생 중 가장 큰 오점은 아마 리그 우승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유럽 대항전에서의 활약으로 멘디에타는 빅클럽들의 주목을 받았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그를 원했지만 발렌시아의 수뇌부는 국내 이적 절대 불가라는 방침을 내놓았다. 멘디에타를 부른 또 다른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2001년 세리에A 사상 최고 이적료인 4,200만 파운드(약 600억 원)를 지불한 라치오가 멘디에타를 품에 안았다.

하지만 라치오에서 멘디에타는 애물단지였다. 줄곧 네드베드와 비교를 당했고, 먹튀 논란 등으로 팬들의 공분을 샀다. 여러 악재가 따라다녔고 2002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교체 출전하는 경기가 많았다. 이후 바르셀로나를 거쳐 2003년 미들즈브로에 이적했다. 31경기에 나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부상으로 고생하다 2008년 은퇴했다.

2000년대 초 발렌시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4인방에 대해서는 ‘축덕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해축야화 38화’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해축야화는 매주 금요일에 1부가, 토요일에 2부가 업로드 되며, 팟캐스트 어플 ‘팟빵’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레전드 오브 풋볼은 축구 팟캐스트 ‘해축야화’의 한 코너입니다. 아래 URL을 클릭하면 바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069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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