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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화영의 골프장 人문학] 영국의 더비 백작과 스윈리 포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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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 둘러싸인 은밀한 동화속 코스같은 스윈리 포레스트.


영국의 더비 백작과 스윈리 포레스트

1909년 개장한 영국 런던의 스윈리 포레스트 골프클럽은 ‘영국의 오거스타내셔널’이라 불릴 정도로 은밀하기 그지없는 골프장이다. 오랫동안 스코어카드도 없었고, 지금도 홈페이지는 없다. 골프장이 조성된 배경을 캐보면 이해가 간다.

에드워드 스탠리 제17대 더비

영국은 봉건제도가 지켜지던 중세시대부터 왕실과 귀족 가문이 쭉 이어져오고 있다. 수백 년 된 귀족 백작(伯爵, Earl)들이 오늘날 성씨에도 남아 있다. 오랜 가문 중에는 백작 가문이 많은데 훗날 공작, 후작들도 백작 가문에서 파생되어 승격된 경우가 많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격퇴하면서 구국의 영웅이 된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으로 알려진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는 모닝턴 백작(Earl of Mornington)이었다. 비운의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스펜서(Spencer) 백작 집안이라 결혼 전의 성이 스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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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하고 정갈한 클럽하우스.


그중에 700년 가량 된 가장 오랜 가문이 바로 더비 백작(Earl of Derby) 즉, ‘스탠리(Stanley)’ 가문이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4세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신임을 받았던 봉건 영주 랭커스터 백작 3세가 1337년에 더비 백작 지위를 부여받으면서 더비 가문은 시작됐다.

같은 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두 라이벌 축구팀끼리의 경기를 ‘더비’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잉글랜드 더비셔 주의 더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보다는 승마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더 재미나다.

1779년 한 귀족 파티에서 에드워드 스미스 스탠리(13대 더비 백작)와 찰스 번버리 경이 새로운 경마 대회를 만들기로 의기투합 했다. 그리곤 대회 명칭을 정하려고 실강이를 벌이다가 결국 동전을 던져 정하기로 했는데 더비 백작이 이겼다. 그래서 새로운 경마대회는 더비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이듬해 5월 7일 런던 교외 엡섬다운스에서 처음 열리게 됐다고 한다. 이후 경마 대회마다 더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것이 축구리그에서도 차용해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아들인 더비 백작 14대 에드워드 제프리 스탠리는 총리를 세 번이나 지낸 명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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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하우스 응접실 구석의 더비 백작 초상화.


제17대 더비 백작인 에드워드 G.V. 스탠리(1865.4.4.~1948.2.4.)는 군인이면서 보수당원, 외교관, 경마주, 프랑스 대사를 지냈다. 두 번째 보어 전쟁에서 장교로 복무했고, 1903년 10월에는 의회에 들어갔고, 5년 뒤인 1908년에는 상원에 들어간다. 1916~1918년까지 제1차 대전 기간에는 전시 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뼈대 있는 가문이다 보니 런던 서쪽 애스콧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런던 인근 서닝데일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던 더비 백작이 앞팀의 슬로우 플레이 때문인지 몰라도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윈저성에서 주최한 모임에 늦고 말았다. 국왕은 ‘백작 정도 되면 자기만의 골프장 하나쯤 있어야하는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던 더비 백작이 왕의 말을 듣고는 며칠 고민하더니 드디어 자신의 영지 일부를 용도 변경해 코스를 만들었다.

처음 땅을 사서 개장까지 12년이 걸렸다. 코스 설계는 당대의 명 디자이너 해리 콜트가 맡아 1909년에 개장한다. 더비 백작으로서는 왕의 명으로 만든 코스이니 이후로는 자신의 친구들만 이용하도록 한다. 더 이상 슬로우 플레이 때문에 왕이 주재하는 미팅에 늦지도 않았을 터. 그래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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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윈리포레스트 1번 홀 그린.


소나무 우거진 숲속의 산책

오거스타 이상의 은밀함을 가진 골프장이 바로 스윈리 포레스트(Swinley Forest)다. 런던 도심 서쪽의 애스콧 에버딘셔 스윈리 숲에 만들어진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1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온 듯하다. 코스는 넓지 않아 파68에 전장이 6019야드에 불과하다. 아담한 면적에 태고의 소나무 숲속에 코스가 앉혀져 있다. 전부 1만 4,000여 소나무 한 그루마다 오거스타내셔널처럼 20~30미터나 되는 높이와 위용을 자랑한다.

골프장이 얼마나 폐쇄적이냐 하면 홈페이지 자체가 없는 것은 물론, 100년이 지났으나 골프장 대표도 없고, 스코어카드도 최근에야 만들어졌다. 진입로에는 골프장이란 걸 알 수 있는 문패가 조그맣게 붙어 있을 뿐이다. 진입로만 몇 킬로미터나 되는 한국의 골프장과는 좀 차이가 난다. 개장 이후에 친구들끼리만 이용한 전통으로 인해 최근까지 극소수의 회원들과 그들로부터 초청받은 선택된 소수 외에는 이곳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클럽하우스도 마치 가정집 거실 같다. 벽에는 설립자인 더비 백작 사진만 걸려 있다.

짧은 전장에도 불구하고, 코스는 명품이다. 직선처럼 길게 이어진 두 개의 오르막 파4 홀인 6번, 7번 홀이 챌린징하며 후반에는 뱀처럼 휘어 내려가는 가장 긴 파4 홀인 12번 홀이 인상적이다. 파5인 홀은 5번 홀 하나뿐이고 블루 티에서도 497야드에 불과하다. 반면 파3 홀은 후반의 3개를 포함해 5개나 된다. 그린이 엄청 빨라 스코어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5개의 파3 홀이 하나같이 해리 콜트 특유의 유쾌하고도 난해한 도전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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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홀 티잉그라운드 옆에는 클럽도 닦고, 개에게 목도 축이라는 수도가 마련되어 있다.


라운드를 마치면 감칠맛 같은 여운이 남고, 다시 돌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은밀한 정원 같은 코스니까 말이다. 진달래가 곳곳에 피어있고 5번 홀 티잉 그라운드 옆으로는 개를 데리고 라운드 하는 골퍼가 개에게 물을 마시도록 한 조그만 수도꼭지도 조성되어 있다.

회원이야 극소수인데 왕궁이 가까워서인지 에딘버러공작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인 필립 공, 그리고 차남인 요크공작 앤드루 왕자가 포함되어 있다. 엄격한 폐쇄정책을 지켜왔으나 최근엔 일반인에게 개방도 하는 것 같다. 주중에는 외국인도 부킹할 수 있다.

이 골프장은 하지만 여전히 캡틴도 없고, 그 흔한 챔피언십 대회도 없고, 홈페이지도 없다. 골프장은 아마도 더비 백작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에드워드 스탠리가 제 19대 더비 백작 지위를 잇고 있으니 그가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다.

더비 백작의 상속자는 ‘이상한 남작(Baron Strange)’이라는 코믹한 별칭으로도 불린다. 총리를 배출하는가 하면 승마, 골프에 이름을 남겼으니 좀 이상한 귀족이라는 뜻일까? 하지만 왕의 핀잔 한 마디에 골프장을 선듯 조성한 것이나, 전시에는 총리가 되어 앞장 선 것이나 이런 것이 영국 상류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700년을 내려오며 19대를 지켜온 가문이기에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당연한 듯 작용한 것이다. [헤럴드스포츠=남화영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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