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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화영이 만난 골프人]-한국 골프기자 1호 최영정(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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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정 칼럼 집필실에 걸린 친형 최배달의 사진.


무도인의 정신으로 글쓰기 48년

용산구 서계동의 최영정 옹을 찾아가면 항상 집필실 옆에 있는 횟집에 들러 해물탕을 주문한다. 6년 전과 2년 전 그리고 지난 12일까지 세 번을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소주까지 한 잔씩 나눴다. 84세에도 여전히 골프에 관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그는 타고난 강골이다. 최근에 책을 쓰느라 시력이 나빠져 사물이 2겹으로 보이는 까닭에 안대를 바꿔 끼는 것 외에는 건강도 괜찮아 보였다. 얘기하면서 호두를 굴렸고, 식사를 하면서 밥 한 모금을 넣고 오래오래 씹었다. 뚜렷한 기억력에 아직도 글을 쓰는 체력이 유지되는 건 타고난 강골에 더해 섭생(攝生)을 잘 하는 때문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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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실에 걸린 최영정 옹의 어릴 적 6형제 사진. 위에서 네번째가 영의(배달), 다섯번째가 영정이다.


최영정 옹을 말하자면 그의 가계(家系)가 빠질 수 없다. 전북 김제 출신으로 1931년생이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형제자매가 많다. 6남4녀였다. 그중에 남자 형제들만 재미나게 얼굴을 맞대고 사진을 찍었다. 위로부터 영창, 영명, 영봉, 영의, 영정, 영종이다. 자신이 5남이고 바로 위의 형이 일본에서 극진공수도(가라데)를 창시한 최배달 즉 최영의 선생이다. 중간에 누나(화용)가 있었다. 부친이 일제 시대 면장을 지내 집안 형편은 어렵지 않았다.

“사진을 보니 형제분들 눈빛들이 형형해서 한 자리씩들 하셨겠다”고 했더니 “한 자리는 아니고 한 가락들 했지”라는 대답으로 돌아왔다. 형제들 모두 체격과 운동 신경이 뛰어났다. 그 역시 유도 3단이었고 학창 시절 씨름으로 소도 탔다. 바로 위 형인 최배달과는 8살 나이 차이가 나는 데다, 형이 38년에 일본 항공학교로 유학을 가면서 함께 지낸 시간이 별로 없다.

하지만 무도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산 형에 대한 동경이 느껴졌다. 집필실 입구에 붙어있는 포스터로 화제가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영화 <넘버3>에서 송강호가 열연한 장면부터 떠올랐다. “예, 예, 옛날에 최영의 라는 분이 계셨어. 저, 저, 전 세계를 돌며 맞장을 뜨셨던 분이셨지. 그분이 황소뿔 여러 개를 작살내셨어. 그, 그분 스타일이 딱 그래. 소 앞에 서면 ‘너 소냐? 황소? 나 최영의야.’ 그리고 바로 소뿔을 딱 잡아 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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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칼럼 집필실 입구에 걸린 1950년에 만든 소뿔 이벤트 포스터.


최배달은 일본으로 건너가 10년 뒤 전일본가라테선수권에서 우승한 뒤로는 1년8개월간 산속에서 수련을 했고 바윗돌을 깨는 훈련도 했다. 이후로는 극진공수도를 창설한 뒤에 도장을 알리고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돌며 ‘맞짱’을 떴다. 1950년 11월에는 일본에서 47마리의 황소 뿔을 꺾어 쓰러뜨리고, 그중에 4마리는 즉사시켰다. 극진공수도 홍보의 일환이었다.

“도살장을 다니면서 죽게 된 소를 구해 뿔을 떼는 거였지. 그건 방학기나 고우영 같은 만화가들이 형님을 만나 얘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해안가를 돌면서 형님이 창설한 극진 공수도를 알리는 이벤트를 열었는데 나중에는 도쿄의 큰 경기장인 교라쿠엔에서 실제로 시범을 보이는 행사로 발전했어. 수많은 관중의 기세에 눌린 때문인지 소가 무릎을 꿇어버리는 바람에 대회 당일은 맥없이 끝났다고 하데.” 6.25전쟁 때 받은 ‘오야마 7단과 황소의 격투’ 포스터를 그는 지금까지도 사무실 앞에 걸어두고 있다. 집필실 안에도 최배달이 정권 찌르기를 하는 사진이 중앙에 걸려 있고 의자에는 '극진공수'라고 쓰인 도복이 걸려 있다.

무도인의 강직함이 그가 48년간 골프에 대한 글을 꾸준히 써온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국내 기자 중에서는 가장 먼저 골프를 취재했으니, 그의 말은 간혹 정설과 배치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새겨들을 대목이 많다. 그는 주로 골프 초창기에 한국에서 골프가 시작되는 분야에 정통했다. 초창기의 한국 골프는 씹을수록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골프로 글을 써서 밥을 먹고사는 나 역시 섭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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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형 최배달과 세인트앤드루스 사진, 그리고 극진공수가 쓰여진 도복과 이글패들. 한국 1호 기자 최영정 옹의 집필실에는 48년 역사가 녹아있다.


*1887년의 원산골프장이 한반도에 등장한 최초 코스라고?
원산골프장은 전설에 불과하다. 1970년에 다카바라 도요시가 일본 골프전문지 <파골프>에 기고한 데서 나왔다. 그걸 근거로 한국 골프가 일본에 앞섰다는 논리도 편다. 하지만 다카바라는 2년 뒤에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정정했다. 원산 해관에 있었다던 6홀 코스는 연습장을 확대해석한 것 같다. 해안가에 핀을 꽂아둔 연습장을 마을 촌로들이 구경하고 전한 정도였다. 그걸로 한반도에 골프가 일본(1898년)보다 먼저 도입되었다고 주장하는 건 논리가 서지 않는다. 실은 1921년에 조성된 효창원 골프장이라고 봐야한다. 물론 일본인들이 만들었지만.

*한국 프로골프의 역사는 언제부터인가?
한국 프로골프사의 기원을 어디서 잡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한국인 골프 1호인 연덕춘이 일본에서 프로골퍼 자격을 얻은 해에 시작된다. 1916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연덕춘은 1935년 한국인 최초로 프로골퍼 자격을 얻었다. 그는 경성골프클럽(어린이대공원 자리. 해방 후에 서울CC로 재건)이 뽑은 ‘제 1호 조선인 프로 후보’로 일본 유학을 가서 1935년 2월 일본 프로 자격증을 획득했다. 그리고 1941년 일본오픈에서 4라운드 합계 290타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다. 한국프로골프선수권이나 한국오픈이 1958년에 시작된 것으로 한국프로골프의 역사를 삼기보다는 선수가 역사 기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초창기 한국 골프는 정권의 비호 하에 발전했나?
1965년 9월 창설된 대한골프협회(KGA.초기엔 한국골프협회로 불렸다)는 72년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4대 회장에 올랐고, 2년 뒤인 74년에는 박종규 청와대 전 경호실장이 5대 KGA 회장을 맡았다. 앞서 2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1년간 재임한 김종락 씨는 5.16쿠데타 주체 세력의 일원으로 은행가 출신이고, 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이다. 이밖에는 주로 기업인들이 KGA 회장을 맡았지만 초창기에는 군사정권의 비호 하에 골프는 성장할 수 있었다. 김형욱은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창설에도 기여했다. 68년 봄 서울CC 홍덕산 헤드프로의 부탁을 받아 골프 재계인사 21명에게서 거의 100만원씩 총 2,000만원을 거두어 이를 밑천으로 협회를 창설(5월17일)하게 된다. 초대 회장은 허정구 이사장이었으나 고문을 맡은 김형욱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골프가 오늘날처럼 발전한 가장 큰 계기를 찾는다면?
1989년 ‘골프 대중화’를 선언한 노태우 정권 때 골프장 허가권을 지방 정부에 이관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오로지 청와대가 골프장 설립허가를 내주었다. 그건 대통령의 특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재벌에게서 비자금을 얻어내는 좋은 수단일 수 있었다. 당시 설립 권한이 지방정부로 이관되자 골프장에 대한 중과세가 감면되면서 무려 130여개의 골프장이 신규 허가를 취득하게 되었다.

*현대 한국 골프사에서 아쉬운 대목은?
난지도 골프장을 없앤 것이다. 쓰레기장을 골프장으로 잘 바꿔서 골프 대중화에 기여하던 곳을, 그것도 무려 300억원 이상이나 든 골프장을 없애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것에 대해 골프협회나 단체는 왜 아무 말도 못하나? 지난번 용산 미 8군 골프장이 없어질 때도 나는 반대했었다. 58년 미8군 사령관이 부탁으로 만들었으니 국내에서는 군자리 서울CC이후 가장 오랜 곳이었다. 오랜 골프장은 세월이 지나면 문화재가 된다. 선진국치고 역사적인 골프장을 없앤 사례가 없다. 이제 남아 있는 중에 가장 오랜 골프장은 한양CC다. 64년 만들어졌으니 일본을 따라 위탁금제 중에서는 최초의 코스가 남았다.

*박세리가 한국 골프에 기여한 것은?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가장 큰 역할은 언론 미디어에서의 골프 해금(解禁)이었다. <조선일보>에서는 내가 67년부터 골프를 취재했지만 다른 언론들은 대부분 반(反)골프 정서가 강했다. 하지만 IMF외환관리 시절에 박세리가 드라마틱하게 우승한 뒤로는 언론에서 골프 뉴스가 풀렸다. 당시 <중앙일보>는 무려 7개면을 할애해서 특집으로 소개했다. 나는 칼럼을 통해 ‘중앙일보가 과했다’고 썼다. 박세리 우승 이후에는 신문 지면에서 골프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최영정 옹은 한국 최초의 1호 골프기자다. 초창기 한국 골프사에 대해 정통하고 박식하다. 골프 하나의 테마에 그만큼 많은 저술(22권)을 한 사람도 없다. 그보다 오래 한국의 골프 변천사를 지켜본 이도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올 때 그는 ‘글을 쓸 때면 항상 누구를 위해 글을 쓸 것인가, 골프에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기사를 잘 써야 한다. 골퍼들의 권리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골프장이나 용품사 입장을 마구잡이로 홍보하기보다는 골퍼의 편에 서야 한다.”

*인터뷰 내용 일부와 팩트 체킹은 최영정 저 <코스에 자취를 남긴 사람들>에서 인용했습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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